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간행
시가 담고 있는 심오함이 너무 커서 숨이 콱 막혀오던 날이 있었다.
가라앉히자고 두 손으로 가슴 두드리며 나를 제어했어야 했다.
물로 만나자는데 나는 늘 불을 기다렸다.
고요의 물 흐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젊은 시절에 만난 시였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직 잘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신문 기사 속에서 시인이 남북 관계를 소재로 이 글을 썼다는 말에 그만 맥이 풀렸던 기억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처음 이 시를 읽던 그 감 그대로 지니고 있기로 했다.
여전히 그 감으로 늘 이 시를 읽는다.
흐르는 물로 만나자, 우리!
라는 소원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을가.
너끈히 서로를 감당해낼 수 있도록 은은한 만남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같이 일지 않고
물같이 고요한 만남이었다면~
강은교 시인은 건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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