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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어쨌든 공부

판타 레이 2 - 민태기 저

 

 

 

판타 레이

 

반납일을 지켰다. 이 책을 구매할 것이다. 내가 한 번 더 읽고 군에 있는 내 아이에게 보낼 것이다.

 

독후감 '판타 레이 2'

- 민태기 저

- 사이언스 북스(출판사)

 

 

- 글의 제목을 '판타 레이 2'로 붙인다.

 

 

옛날 어느날, 나도 어느 분야 유명 인사가 되어 위의 것처럼 명 문장(紋章)을 창조하고 싶었다.

 

세 시간 십팔 분 십구 초. '나가 좋아하는 클래식 10'의 다섯 번째 안에 항상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 수난곡'. 이 곡을 들으면서부터는 황홀지경이어서 더욱 순조롭게 책을 마저 읽을 수 있었다. 사진 설명과 그래프 해석, 관련 그림 설명, '후주'에 함께 있는 설명까지 완독 했다. 민태기 선생님은 나와 궁합(?)이 딱 맞다. 그는, 세상에나, '혁명과 낭만의 유체 과학사'라는 부제목을 안고 있는 글을 쓰면서 그곳에 나의 음악 '마태 수난곡'을 들먹이셨다. '낭만'이며 '혁명'이 있으니 당연하다 생각도 없지 않지만,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다. 바흐의 음악이 '과학사'에서 들먹여지다니. 어쩌면 내가 지닌 과학 지식 혹은 상식이 너무 짧아서일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전곡을 들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태 수난곡' 나의 사고를 '숭고'의 범위로 안내하는 음악이다.

 

 

두껍다. 548쪽. 두께감마저 긍정적으로 느껴진 것은 책과 정이 듬뿍 든 후였다. 최근 들어 읽은 책 중 낱장이 이렇게나 고급 수준인 것은 처음이다. 아마 내가 읽어낸 거의 모든 책 중 최고의 종이를 사용한 듯싶다. 부드럽게 넘겨졌다. '과학'이라는데, 나를 'S대'에 갈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줄 만큼 내 인생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 과학 도서를 이처럼 순하게 읽어댈 수 있다니 내심 나 스스로 생각되는 듬직함을 나는 칭찬하면서 글을 읽었다.

 

어제 수박 겉핥기식으로 썼던 독후감에 이어 한 편의 글을 더 쓴다. 하여 이 글의 제목은 '판타 레이 2'이다. 나가 쓰고자 하는 내용에 맞추려면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 책을 가르침대로 살리라.'라는 장문의 제목이 맞으리라. 너무 요란하다 싶어 간단하게, 혹은 최고의 함축을 담은 제목으로 올리기로 한다. 

 

레이놀즈의 초상화.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을 이 페이지를 열자마자 느껴졌다. 레이놀즈는 통계역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기억된다.

 

자,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용히 내 심정을 고백한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갖춘 책의 독후감을 이처럼 가볍게 쓰는 것을 용서하시기를. 어제도 그랬지만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판타 레이 2'도 그 질이 너무 가볍다. 진국을 쏙 빼서 보배처럼 따라 모셔놓고 꼭 필요할 때 살짝 최고로 사랑하는 이에게 한 숟가락씩, 조심스레 떠먹어야 할 정도의 내용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를 못한다. 나에게는 진국을 우려낼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다. 슬프다. 

 

이 글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 심리를 지닌 자가 쓴 것이다. 흐릿하게 알고 있는 수많은 일상의 과학이 전문 용어로 펼쳐지는 것은 나는 단 한 가지도 지금 적을 수 없다. 그래, 아인슈타인의 노벨상이 '상대성의 법칙'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구나. 고무는 바퀴를 낳게 했다. 바퀴가 엔진을 가동하고 엔진이 우주 비행을 꿈꾸게 했다. 유체과학이란 현재 양자역학의 연구까지 오게 했구나. 양자역학을 내가 이 세상에서 현재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공부했구나. 아, 과학계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사고는 대단한 역할을 했구나. 내가 이 책에서 알게 된 것을 나열할 수 있는 수준은 이 정도이다. 더 바라지 말라. 나는 온전히 이해했다고 여겨지는 대중가요의 노랫말도 돌아서면 기억이 나지 않은 정도의 두뇌가 작동 중인 사람이다. 무엇을 기대하랴.

 

하여 오늘은 이 책을 끝까지, 온전히 읽어낸 기쁨을 가만 묻어두는 것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이 책에서 배운 삶의 지혜'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작가가 하고자 하신 말씀과는 너무 먼 거리인 듯싶지만 뛰어난 두뇌를 소유하신(분명!) 작가 민태기 선생님은 오늘 이 비루한 글까지,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이 내용을 적는 나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라. 사진과 동영상 강의 속의 모습으로만 선생님의 뵈었지만 분명 마음마저 참 착하신 분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나 자신이 얻은 교훈은 참 많고 크다. 읽는 내내 내가 이 책을 결혼 전에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줄곧 생각했다. 나의 아이를 좀 더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을 텐데 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자, 나의 수준에서 순수하게 쓰는 글이니 부디 용서하시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아주 진하게 느끼는 글일 거다. 미리 한 줄로 내놓는다. 나는 이 책에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는 것이다. 

 

나는 고야의 그림이며 그의 인생을 참 좋아한다. 그의 생 중 독한 자존감이 나를 울린다.

 

첫째 학문의 힘도 세습되는구나. 이 표현이 맞나? 공부를 하는 힘도 '부전자전', '모전자전', '형전제전', 조전손전 등 혈연으로부터 배워 내려온 학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구나. 공부하는 데에는 각 가정의 분위기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로구나. 공부하고자 하는 열망은 가정에서 싹트는구나. 당연한 것을 나는 자못 심각하게  깨달았다. 우리가 평소 말하는 '그 아비에 그 자식',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는 말은 그저 가볍게 농처럼 내뱉을 것이 아니구나. 이는 어쩌면 '진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자녀들에게 멘토를 엮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게 하는 학습도(전문 용어가 있는데 잊었다.) 곧 '공부하는 가정'을 추구하는 보호자의 대단한 전략이다. 이는 대대손손 다져온 가문의 훌륭함을 지닌 후손으로 자라게 하려는 욕심이 큰 몫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알차게 키운 자아정체성을 지니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인격체로 자식을 키워내려는 참다운 자식 교육의 방법이었겠다. 

 

대학 시절 반년 정도 유럽 여행을 가 있던 아이가 돌아와서는 인종 차별을 당했노라고 앞으로는 유럽 여행은 지양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선 당한 것에 대한 분개가 컸던 듯싶다. 한편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키운 육아법의 병폐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 문제 삼아 해결책을 모색하고 더 다은 지구촌이 되게 하겠다는 야망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아프리카만 빼고 여러 곳을 다닌 아이는 너무 작은 그릇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에 탐구적인 자세를 지니게 하는 경험을 지니는 기회를 많이 마련했다면 더 많은 여행을 좀 다니게 했더라면 보다 큰 그릇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이는 지극히 '개인차'가 있음을 전제로 쓰는 것이니 더 깊게는 들어가지 말자. 아이는 지금 군대에 있으면서 내년 군 휴가에는 어찌 제 부모와 혼자된 이모를 모시고 가까운 해외라도 나가볼 요량을 갖고있기도 하다. 그저, 단순하게, 나의 육아 방법을 반성했을 따름이다.

 

부러웠다. 수많은 학자가 혈연 간 배운 공부를 이어 해냈더라. 때로 잘못 꼬이기도 하여 어떤 과학자는 아들의 발견을 제 것으로 하려다가 발각되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학문의 결과는 곧 어느 가족의 힘이었다는 것에 생각에 미치고 확실한 것임을 자각하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육아를 다시 하게 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아 한참 생각했다. 가정교육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실감했다. 한편 위대한 학자의 곁을 지키는 여자의 힘도 곳곳에서 발휘되었다는 것을 함께 깨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사진을 나는 또 무척 좋아한다. 그의 눈빛을 만나면 황홀해진다. 그의 철학 서적을 늘 읽는다.

 

 

둘째 건강한 개인의 욕망, 학자들의 주관적인 욕망이 모아져 현생을 사는 인간계가 운용되는구나. 이 세상이 수많은 '문제'를 안고 살면서도 세월 지나 언제 그랬냐는 듯 해결되고 또 다른 방향의 긍정적인 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개인, 개인의 공부 욕심이로구나. 그것들이 끊임없이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 힘이구나.

 

이 세상을 수많은 사람이 어우러져 굴러가게 하는 힘은 과학자의 힘이구나. 한다는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학자가 학문을 탐색하는 욕망이 대단하다. 고집스럽게 진행시킨다. 끝장을 보기 위해 자기 생을 헌신한다. 자기 생을 담보로 자기가 연구하고자 하는 학문에 몰입한다. 그 힘들이 모아져 개인의 학습욕을 해결하고 이는 나아가 사람들이 효과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인간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힘이 되었다. 감사드린다.

 

셋째 위대한 과학자들은 참다운 용기를 지닌 분들이구나. 그들은 자기 생을 다 바쳐서 자기 학문의 세계를 끝까지 연구해 냈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탐구하고자 한 문제에는 자기 목숨을 내 걸로 매달렸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사뭇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책 속에서 들먹여지는 수많은 유체 과학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더라는 것이다. 마치 유체 과학자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공식처럼 그렇게.

 

과학자들은 자신의 용기가 무의미해진다고 느낄 대에는 대단한 융통성을 발휘하여 재빨리 방향을 튼다. 이것 또한 용기 백배 한 것이다. 물론 새롭게 진출하고자 하는 학문의 사전 탐색은 그 깊이가 무겁다. 인간 세상을 보다 나은 생태계로 만들기 위해서 헌신하셨다. 때로 자아와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요구나 변경이나 방향 전환을 폭력적으로 요구해 올 때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용기조차 머뭇거리지 않는다. 

 

 

 

미국의 매커니즘의 발발에 관련된 중국인 첸쉐선의 생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넷째 과학자들은 문, 이과가 구별된 세상의 사람으로 한정되는 부류가 아니구나. 이 책의 제목이 언급하듯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과학자들은 문, 이과의 온갖 정서와 힘을 모두 지닌 온전체로구나. 그들은 과학으로 닫힌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미학과 심리학, 음악과 미술과 체육 등 문, 이과로 구별 지을 필요가 없는 온전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로구나. 아, 수학을 잘하는 이들 중 음악가가 많은 이유를 알겠구나. 진정한 과학자는 자기 마음을 승화시켜 음악과 미술의 세계, 철학과 심리학, 인류학의 세계 속에 펼쳐놓을 줄 나는 이들이구나. 

 

사는 것이 늘 조물조물한 나는 공부의 범위도 참 비좁다. 이 책에서 수많은 과학자와 그들의 학문에 연결된 예술가들을 공부해 보니 과학자들은 대부분 예술과 철학과 미학과 인류학 등을 함께 탐색하는 세계였다. 하여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자랑하곤 하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과학 사랑과 그 참모습을 알지 못했다. '자살' 지향적인 유전자를 타고난 자식 중 한 아이라도 지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비트겐슈타인에게 과학 공부를 하게 했다는 정도였다.

 

올해 들어 양자역학을 아주 조금 공부하면서 나는 과학계에도 비트겐슈타인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닌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줄곧 비트겐슈타인의 '불확실성'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곤 했다. 온전히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내가 주문하여 비치된 일터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와 다시 읽기도 했다. 언젠가는 '양자역학과 비트겐슈타인의 불확실성'이라는 제목으로 내 생각을 써보고 싶기도 하다. 그의 '논리실증주의'를 드러내는 한 문장이 생각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한편 우리나라 중추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는 문과와 이과의 이분법적 형식을 떠올리면 참 허탈하다. 책에서도 말씀하신다. 이것은 불균형 교육이자 반신불수의 교육이며 순전히 대중성에 야합한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문, 이과로 나누는 교육 방식은 왜정시대의 산물이란다. 2011년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 발표 시 '애플은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의 교차점에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를 오판하여 가히 '인문학 열풍'의 회오리 속에 침몰하였다. 애플의 문장은 이런 뜻이 아니었다. 볼테르 철학 사전은 뉴턴 역학을 소개한 것이고 그리스와 로마의 자유인을 대상으로 한 소양 교육은 '대학',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에 '문법'과 '논리학'과 '수사학'이 더해졌단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굴절 광학'과 '기하학'에서 출발하고 철학자 칸트의 박사논문은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이며 이분법으로 유명한 헤겔 박사 논문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한 관행'이란다. 공자도 그가 얼마나 수학을 중요시했는지 그의 책에 강조했단다. 

 

다섯째 최선을 다한 다음에 운이 따르더라. 보텍스 오류, 소용돌이며 와동의 혼전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 이들의 앞에 복주머니가 도착하더라. 실패, 긴장, 아우성, 혼란을 이겨내고 혼신을 다한 이들에게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내려와 그들을 살피더라. 오리무중으로 나아가려고 비틀어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제 생을 헌납한 자들에게 마침내 신의 축복이 내리더라. 경제학의 한 획을 그은 케인즈의 말대로 마침내 '신'이 도착했다. 물론 자기 뜻을 버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으신 과학자들이여, 부디 부활할 수 있기를. 당신들이 하고자 했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훌륭한 생각들과 판단들과 창조물들을 쏟아 내놓으시기를. 

 

유체 과학사의 발전을 정리한다. 17~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던 연소(combustion) 현상을 비롯한 다양한 화학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물질이었던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가연성 물질이 타기 쉬운 성질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물질설이 쇠하고 '화학'으로 길을 뚫고 나아간다. 이는 모든 물질의 입자와 결합하여, 그 다소에 의해 기(氣), 액, 고태(固態) 등을 생성한다고 생각하는, 무게를 갖지 않는 측량 불가의 원소라는 설인 '칼로릭'으로 발전한다. 라부아지에에 의해 열의 원인, 즉 열을 발생시키는 아주 탄력성이 있는 유체를 일종의 원소라고 인정하고 칼로릭이라 부른 이것은 다시 '열역학'으로 사그라진다. 열역학[thermodynamics] 은 19세기 중엽에 완성되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과 같은 열기관(heat engine)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효율을 향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열역학은 오늘날 열역학은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기상학, 해양학, 화학공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제 화학과 물리학은 열역학 위에 유체역학 위에 에테르가 활활, 운동을 하고 있다. 현대 과학이다. 

 

 

당시 우리 역사가 평화스럽게 진행되었다면 더 나은 교육제도가 가능해졌을까?                                                                                                            이 기사는 저 왼쪽 조그마한 부분으로 실린 '자연과학과 학제'에 집중하여 읽어야 할 우리 사회를 말씀하시는 부분이다.

 

 

세상사가 두부 자르듯 판 가르기가 불가능하듯 학문도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특히 과학은 빛과 어두움의 교차  위에서 물질은 생성되고 소멸이 되면서 실재한다. 중국에서는 루쉰이 '아Q정전'으로 예상하듯 '정신 승리'의 열등감으로 뒤범벅이 된 중국 등은 소모적인 이념 논쟁으로 치닫고 불운의 천재 앨런 튜닝은 세상은 모든 현상을 반복된 기계 연산만으로 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하다가 생을 마친다. 그의 생을 기반으로 현대는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앨런 튜닝이여, 슬퍼하지 말라. 책 '슬픈 열대'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이런 문장을 기록했다지 않은가.

'명백한 것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현생은 또, 당신의 후예들은 또, '생성'과 '소멸'과 '반복'으로 지구의 자전을 훌륭하게 가동하고 있나니. 

 

유체 과학사를 통해 콜드플레이의 음악 '비바 라 비라(이 음악과 관련된 역사 인물과 관련 상황을 살펴보면서 노랫말, 가락을 유심히 들으면 그야말로 인생사를 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인간사의 근본을 헤아리곤 한다. 가끔 빠져나오는 길을 찾을 수 없어 한참 듣고 있을 수도 있다. 콜드플레이는 사랑이다.)'를 살고 있다는 경고 혹은 축복(?)을 읽을 수 있다. 다윈은 말했다. 책 ' 종의 기원'에서. 

'아주 단순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끊임없는 형태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 '판타 레이'는 헤라이클레이토스전, '판타 레이 - 만물은 유전한다.'에서 채록한 것이란다. 저자, 민태기 박사님은 끝 문장을 또 이렇게 적으시면서 마감하셨다.

 

'과학은 고립된 개별 분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이 탄생시킨 우리 사회에 대한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며칠, 참 행복했다. 


추 : 나, 다시는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은 거부하겠노라고 다짐, 또 다짐해 놓은 상태인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생각의 변화가 꿈틀거린다. 다시 또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때는 정말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