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향은 바다에 인접해 있다.
어머니가 시집와서 사신 곳, 즉 내 고향은 내륙에 위치한다. 한참 나가야 바다가 보인다. 내 어린 시절이 놀이터에 바다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 밥상에서 갓 잡아온 바닷고기를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어머니는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뜻을 좇아 대농의 집을 키워내셨다. 철저한 가부장제였으므로 아버지는 늘 집 밖에서 바쁘셨다. 어머니가 줄곧 머릿수건과 몸빼 차림으로 사셨다. 집안 일, 바깥 일 모든 일 처리가 엄마의 의무였다.
자식들이 십대에 들어서면 어머니 일손에 도움이 되는 것도 가능할 텐데 어머니에게는 그런 자식이 없었다. 어머니의 자식들을 아버지의 평생 꿈이었던 '공부'의 뜻을 따라 초등학교부터 유학 코스를 밟았다.
어머니에게는 '일하는 때'가 따로 있지 않았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심지어 한 밤중에도 일로 바쁘셨다. 한 마디로 정신없이 바쁘셨다. 눈 뜨면 일이요, 눈 감아야 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기간이 십년 정도인데 동안 차분하게 삼시 세 끼를 챙겨 식사하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정식 식사는 커녕 어머니는 늘 제대로 된 허리 펴기도 쉽지 않으셨다. 거의 모든 시간을 퍼질러 앉아 일에 매진하셨다.
이런 어머니가 어쩌다 한 번씩 일어나셔서 쭈욱 허리를 펴시는 때가 있었다. 우슬슬우슬슬 가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정도껏 눈이 내리는 날에는 충분히 바깥일 이 가능했으나 비가 내릴 적에는 쉽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터는 토방(현대 가옥의 거실에 해당되겠다.) 아래였다. 어중간히 내리는 비로 일을 멈추기는 아쉬웠는지 어머니는 바구니나 양푼 등에 뭔가를 담아와서는 이것 저것 손으로 다듬기를 하셨다. 말린 나물을 정리한다는지 양파나 파 등을 다듬는다든지 등 자질구레한 일들에 또 끝이 없었다.
나린 듯 아닌 듯 감질감질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다른 날보다 일감이 적어진 어머니는 한두 번 허리 펴는 기회를 만드셨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개 아래가 뻔허다.'
이 문장은 당시 여러 번 들었던 내 귀만 기억할 뿐 뇌 해석을 미뤄졌다. 다만 어머니의 이 말씀에 어떤 한스러움이 담겨 있다는 생각은 지금이나 당시에나 똑같이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내 바로 위 셋째 언니는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우리집 셋째 딸이었던 언니는 불쌍한 엄마를 돕겠다며 유학 떠나기를 거부했다. 다가오는 아버지의 제일을 이야기하다가 어머니가 하시던 이 말씀이 문득 생각나 물었다.
"외갓집이 바닷가잖아. '개'가 '갯벌'을 말하는 거야. 바닷가 친정이 생각나신 것이었지. 내리는 빗물에 말야. 비 내리면 안개도 뿌옇게 끼고 말이다. '뻔허다'는 아마 눈에 빤히 보인다는 것, 그니까 바닷가 친정이 그립다는 것이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