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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무서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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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장 피에르 멜빌 감독

1950년. 12세 이상관람가

105분

드라마

프랑스

니콜 스테판, 에두아르 데르미스, 르니 코시마, 자크 베르나르, 멜빈 마틴, 마리아 실리아쿠스 등 출연

 

현재를 살다 보니 제목을 읽자마자 그만 애먼 상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영화의 내용이 몇 슬라이드에 앉아 있었다. 학교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려니 싶었다. 생의 시작이랄지 끝, 죽음 등에 대하여 현실적인 인식을 할 수 없는 상태의 어린 시절은 어른들의 눈에서 볼 때 난감하다고들 한다. 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끝없이 되풀이가 된다. 현 세태를 돌아보니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깊어지는 문제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 펼쳐지리라는 예상이었다.

 

넓지 않게 사용되는 공간적인 배경과 흑백의 무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황당한 문제 상황들이 얼마나 어둡게 연출될지 무한 상상을 하게 했다. 추측한 대로 사건의 출발이 학교였다. 한겨울,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쌓인 눈을 돌돌, 공으로 말아 눈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다. 재미 삼아하는 눈싸움을 학교의 문제아 '다즐로'는 단순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는 친한 친구 폴에게 돌을 넣은 눈덩이를 만들어 그의 얼굴이며 가슴께에 던져 쓰러뜨린다.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폴에게는 누나가 있다. 그녀는 병석의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살고 있다. 다즐로에 의지하여 귀가한 동생이 또 하나의 짐이다. 의사가 다녀가고 심장이 놀랬다는 진단이 나온다. 합병증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누나 엘리자베트가 간호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늘었다. 결국 누나는 세심한 보살핌을 위해 남동생의 침실을 함께 사용하게 된다. 그들만의 비밀을 담은 물건을 공유면서 살 만큼 둘은 돈독하다. 이미 성인의 위치로 나아가고 있지만 둘은 그 어떤 것도 서로에게 거슬릴 것이 없는 생활이었다.

 

남몰래 간직하는 비밀의 공유. 그것들에 이상한 눈으로 집중하기에는 둘의 사이가 너무 자연스럽다. 하긴, 생각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지. 조그마한 문제들이 쌓이고 농축되면서 더해지는 힘의 무게가 강력하게 발휘될 때 뜻밖의 문제가 발생하곤 하지. 이를 전제를 나는 무대가 바뀌거나 새로운 인물이 이 둘 사이에 끼어들 때마다 어떻게 커다란 문제로 나아갈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하느라 바빴다. 내 상상의 현실화를 점치느라 여러 정성을 쏟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마 영화는 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데도 영화의 제목을 읽으면서 시작된 나의 상상이 나의 사고를 닫아버렸으리라.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꽉 닫힌 상태의 나의 사고를 깨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크게 와닿지를 않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인물이 필름에 들어설 때마다, 과연 새 무대와 새 사람이 어떻게 커다란 문제를 열 것인가. 나의 추측을 감독은 무시하였다. 시청자인 당신, 마음대로 끌고 가는 영화가 아님을 꼿꼿하게 고집하여 영화를 진행했다. 남매지간인 두 주인공에게 어쩌다가 한 번씩 바뀌는 무대나 새 삶들은 그야말로 조력자 그 이상이 되게 하지를 않았다. 가끔 선을 넘는다 싶은 컷이 연출되어도 그 둘이 늘 해오던 일상을 치부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의심없이!

 

변화를 시도할 수는 있었다. 어머니가 죽고 새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누나 엘리자베트의 외유(일자리 찾아 나서기. 모델)로 알게 된 남자는 누나의 희망대로 부유한 남자. 단 그는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한다. 일터에서 알게 된, 학창 시절 문제아였던 다즐로를 닮은 엘리자베트의 동료인 아가테도 숙소를 찾아 폴의 집으로 오게 되지만 사촌 제라르를 집으로 오게 해서 단순한 동거인으로 내려앉힌다. 의미 부여가 된 새 인물로 들어앉히지 않는다.

 

마침내 감독의 의도를 뚫고 나오는 사건이 만들어진다. 영화 속 사건 전개의 평면을 일그러뜨리는 일이 진행된다. 영화는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 엘리자베트의 사랑을 접게 하여 사건이 상식적인 선상으로 나아가게 하려던 길을 차단한다. 엘리자베트가 일터에서 알게 된 남자 마이클과 결혼을 꿈꾸는데 그를 교총사고로 죽인다. 그의 죽음은 엘리자베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비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더욱 단단하게 한 셈이다. 이는 넘어서는 안 될 점선을 일그러뜨려 실선으로 탈바꿈을 시킨다. 실선은전개도에서 가위질을 당하는 선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유했던 누나와의 비밀이 폴은 그저 일상이었으리라. 남매지간, 평면적인 혈육의 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셈. 폴은 누나와 상관없이 누나에게서 받은 정을 과감하게 차단하고 제 길을 가고자 한다. 새 길로 나서려던 폴을 뒤흔드는 사건은 어릴 적 친구 라즐로를 닮은 모델 아카테로 인해 진행된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폴은 아카테를 사랑하나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다. 누나 엘리자베트에게 너무 많은 생을 저당 잡힌 채 살고 있던 것에서 탈출하려는 안간힘이기도 했으리라.

 

아카테도 그렇다. 폴이 사랑하는 여자. 엘리자베트의 동료. 그들의 집에 임시 거처를 정해 사는 아씨. 그는 영화 초반 폴에게 돌덩이를 넣은 눈싸움으로 폴의 건강을 위협했던 문제아 다즐로를 닮았다. 아카테에게도 어느덧 폴이 남자로 보인다. 열렬하게 사랑하고픈 그녀와 동생 폴을 엘리자베트는 용납하지 못한다. 자기 사랑을 효과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원인이었을까. 돈 많은 남자이자 마음씨 넓은 부호 마이클의 죽음으로 자기 사랑을 펼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을까. 배분해야 할 감정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할 때 그 감정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한 채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을 병적으로 가공한다. 그 힘이 치닫게 되는 힘의 부피와 무게는 강력하다. 분출할 때는 상상 이상의 것이 된다.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엘리자베트가 품고 있던 것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은 것이었다. 폴과 아가테는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폴에게 누나는 그저 보호자로 존재하였던 셈. 남매지간이 전부. 서로 지닌 감정이 오가게 하는 데에도 세상은 정해놓은 틀이 있다. 그 틀 안에 엘리자베트가 꿈꾸는 사랑 의식은 자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엘리자베트는 폴을 향한 진솔한 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근친상간. 네 글자의 구성은 이를 본 일상의 시각이며 상식의 시각을 마비시키려 든다. 세상이 가장 끔찍하게 여길 감정 중의 으뜸일 것이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계의 반역. 서로를 잡아먹는 독이 된다. 성인 예수며 부처, 알라신의 전령 모함메트의 계명에도 이는 존재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말이다. 설령 자기들의 행적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이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한 꺼풀 벗겨낸 다음 기어코 발표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될 일, 제 1호로 말이다. 

 

쟝 콕토의 원작 소설 - 내 단골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가져옴

 

 

제목에 이끌려 영화를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건의 전개였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란다.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 예술에 자기 삶을 투영한 쟝 콕토의 소설. 이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이 영화를 충분히 수긍했다. 억지 수긍이 아니다. 온갖 삶의 현상을 직간접으로 접한 나이가 되고 보니 얼마든지 전개 가능한 스토리이다. 현재 이 영화가 재개봉을 한다거나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연기자를 동원한 리메이크작이 가능하다면 크게 관심을 끌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남매지간의 연기를 펼친 폴과 엘리자베트의 역을 연기한 에두아르 데르미스와 니콜 스테판, 주연 못지않은 조연이었던 르니 코시마와 자크 베르나르의 연기는 참 대단했다.

 

아마 원작 소설은 읽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영화로 머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예측도 변명 삼아 함께한다. 그만큼 영화가 좋았다는 것이다.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를 볼 수 있으면 몇 더 보고 싶다. 1950년에 만든 영화가 이렇게 훌륭해도 되나 싶을 만큼 배우들의 심리 묘사 연기가 정말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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