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번가의 연인 SHSRING CROSS ROAD
1986년
100분
드라마
미국, 영국
데이빗 휴존스 감독
앤 밴크로프트, 안소니 홉킨스, 주디 덴치 등 출연
한 여자가 런던에 왔다.
"런던에 오면 이렇게 하세요."
친절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반 건조의 목소리와 글로 삶을 단속해주던 한 남자가 떠오른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길일까. '런던에 오면~'을 읊던 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바삐, 운명을 찾아가는 듯한 그녀의 걸음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녀는 미국의 뉴욕으로부터 이곳, 런던에 도착해 있다.
음악의 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못갖춘마디'의 구성으로 영화가 출발한다. 못갖춘마디의 음악은 무엇인가, 누구인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원의 손길이 곧 펼쳐지리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우선 딱 한 발자국만 거리에 찍는다. 다음 발자국은 새롭게 출발하는 발자국이다. 처음 발자국의 보조 발자국이자 때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걸음을 저 뒤에 예비해뒀다. 오직 어느 인터넷 플랫폼에서 평점 10점 만점의 9점 대를 넘는다는 사실만을 두 눈으로 확실하게 읽은 후에 시청한 영화. 그리고 안소니 홉킨스 주연이길래 거침없이 영화 보기를 시작한 영화. 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9점 이상을? 아니, 나는 지금껏 뭐 하느라 이 영화를 안 봄?
영화는 미리 밟은 출구를 닫고 재빨리 지나간 일상을 데려온다. 한동안 한 여자의 일상, 그 여자의 일상에 스스로 동행하는 한 남자의 생이 이어진다.
영문학을 들이 파는 여자. 책을 좋아하는 여자. 오직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전부인 여자. 대단한 학력이나 권력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 은근한 생의 활력을 잉태하게 하고 성장시키게 하지 않았을까. 하다 못해 누구 하나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여자. 그 여자의 이름은 '헬레인 헨프'. 그녀에게는 늘 희귀본이 필요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고서적이 필요하다. 오직 그 책을 읽고 싶어서 찾아헤매는 참 독서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영국의 고서점, 'MARKS & CO'은 '런던 84번가'에 자리해 있다. 런던 84번가의 고서점은 '프랭크 도엘 FRANK DOEL'이 책임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영문학을 꿰고 사는 여자? 그녀, 헬레인 헨프가 사는 곳은 미국. 그녀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일상이다. 삶의 전부이다. 런던 고서점의 책임자 직원인 프랭크 도엘로부터 책을 받을 때마다 고마움의 편지를 매우 적절하게, 때로 안성맞춤의 유머까지 곁들여서 보낸다. 선물도 잊지 않는다. 때와 사람을 고려한 선물로. 1950년대, 온 세상이 미로를 헤맬 때이다. 유럽 선진국도 마찬가지였다. 일 인당 고기 50그램에 계란 한 개씩이 배부되던 시절이란다. 헬레인 헨트는 비단 프랭크 도엘에게만 고마움의 무엇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책을 찾느라, 보내느라 바빴을 고서점의 직원 모두에게, 각각에 맞는 선물을 함께 보낸다.
고서점의 프랭크 도엘. 그녀가 원하는 책을 구해서 보낸다. 프랭크 도엘 역시 책만 보내지 않는다. 꼭 편지를 곁들인다. 헬레인 헨프와 나누는 글이 너무 재미있고 늘 받게 되는 선물이 너무 고맙다. 그에 맞춘다. 고서점의 직원들도 그녀 헬레인 헨프에게 편지를 쓴다. 대양을 건너 날아오고 대양을 건너 도착하는 편지. 헬레인 헨프와 프랭크 도엘, 헬레인 헨프와 고서점의 직원 몇. 그들이 보내는 책과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는 우리가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 곁을 소중하게 지켜주었던 시들이며 문장들이 있어 반갑다.
그중 한 편을 적는다.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 예이츠의 시이다. 말하자면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을 잇는 다리 위에는 각국의 문화 예술이 고차원의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우리 시인 김소월이 떠오른다. '진달래꽃'. 곳곳에서 영화를 멈추고 헬레인 헨프가 쓴 글 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베껴봤다. 시들을 찾아봤다.
하늘의 옷감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 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The Cloth of Heaven
- William Butler Yeats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upon my dreams.
- 김억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광익서관, 1921)에서
프랭크 도엘은 때로 굉장히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그녀의 처로부터 헬레인 헨프트와의 관계를 해명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을 만들까 봐 염려스럽다. 남편 만큼이나 냉철한 심사를 지닌 듯한 그녀의 처. 남편 앞에 요리한 음식을 올려두고 기다린다. 프랭크 도엘은 틀림없이 보상한다. 단 한 마디의 거짓이나 단 한 보퉁이의 과장된 친절이 아니다. 자기 입맛 그대로를 냉정하게 언급한다.
" VERY NICE.'
그녀의 예리한 눈초리에 담긴 측정의 수위 정도를 낮춘다. 유리처럼 불안한 경계의 빛에 단단히 나사를 조인 이성의 벽을 고정시켜 움츠러들게 한다. 자기 처와 아이들까지 헬레인 헨프와 소통하게 만든다. 고서점의 직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직원들은 헬레인 헨프로부터 받은 선물로 함께 사는 가족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서 헬레인 헨프에게 편지로 전할 정도이다.
이 모든 상황을 적절하게 이끌어가는 힘은 단연코 프랭크 도엘의 정갈한 삶이다. 그는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별하면서도 사적인 시공간 안에 그녀 헬레인 헨프를 거짓 없이 초대한다. 그녀를 그리워하되 자기 안에 마련해둔 그녀의 자리를 튼튼하게 지켜낸다. 그 자리는 누구 가볍게 건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녀를 철저하게 보호하되 그녀의 언행이 미치는 영향력의 반경을 충분히 확보해둔다. 아내를 위한 그의 진심 어린 사랑 또한 탄탄하다.
그녀, 헬레인 헨프 또한 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되 고마움을 전하는 선에서 마음 나눔을 단단하게 지지하게 한다. 넘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프랭크 도엘 쪽을 향한 언행만이 아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일상을 그녀의 생과 자연스럽게, 곱게 연결할 줄 아는 듬직한 힘을 지녔다. 온몸과 온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그녀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고루, 사심 없이 나눌 줄 안다.
그녀는 당당하므로 무서울 게 없다. 일상에서도 그렇다. 불의라면 떳떳하게 자기 생각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는 용기를 지녔다. 숨지 않는다. 거대 권력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한쪽으로 몸을 돌려 피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아니려니와 그녀가 하는 일은 사전에 적재해 놓은 지식과 지혜와 실력에 기반한 것이므로 쉽게 비틀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허물 수 없는 진심의 너비 안에 또한 지극 정성의 마음을 담아 나누는 편지의 주인공 프랭크 도엘의 생이 고리를 연결한다. 그녀에게 접신이 된 셈이다. 혹은 프랭크 도엘의 힘이 헬레인 헨트의 책에 대한, 글에 대한 진심을 끌어당긴 것일까. 유명 고서점이었지. 그녀의 일상을 운영하는 가성비를 프랭크 도엘은 기꺼이 충족 시켠 셈이다. 헬레인 헨프는 유명세를 좇아 런던의 한 서점의 문을 두드렸고 프랭크 도엘에게는 감이 왔으리라. 헬레인 헨프의 책을 찾아 읽겠다는 '간절함'을.
책이 오가고 편지가 오가고 정성과 위트와 지혜와 곁든 헬레인 헨프의 염원이 오면 프랭크 도엘의 장삿속에 안주할 만한 속세를 초월한 참 인간성이 달려간다. 기다린다. 이 둘의 정성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합의 실체를 어떤 낱말로 명명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하여 숭고하다고. 나는 이를 넘어서는 또 한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성스러운 사랑. 인간계를 넘어서는 사랑. 그 둘의 사랑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는다. 자본이니 이권이니 대중성이니 등. 인간관계를 해부할 때 흔히 사용되는 척도라는 것이 불필요하다. 관계라는 낱말이 지닌 지저분한 측면의 아날로그는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여러 이유로 미국에서 런던까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지만 이미 가 있는 마음을 따라가기에는 돈 등 여러 문제가 얽혀든다. 얽힘은 모순이 되게 하고 미묘한 물음표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근본적인 얽힘의 힘은 이유가 되고 변명이 되다가 인내의 원인과 힘이 되어준다. 마침내 사랑이 된다. 사랑은 아름답다. 사랑은 곱다. 사랑은 어여쁘다.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이 사랑일 수 있는 것일 때야 사랑이다. 느린 사랑이 그렇다. 더딘 사람이 그렇다. 마침내 이루어지는 사랑이 그렇다.
인내가 극에 다다르자 운명을 만든다. 헬레인 헨프의 경제가 풀린다. 글이 인정을 받는다. 이제 곧 기다림의 완성으로 가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이 해결점으로 오르고 여유가 만들어진다. 과감하게 있던 곳을 박차고 일어나 원거리에 있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는 자유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더욱 강해진 인내의 힘은 발휘하는 강력함을 맛볼 수 있는 시점을 눈 앞에 두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은, 인생사는 굴곡의 강도가 셀수록 이를 이루는 받침이 더욱 단단해진다.
신이 하산한다. 둘의 사랑을 질투한다. 이게 무슨 사랑이람. 그러나 인간계로 내려온 신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묵묵히 외치던 두 주인공의 간절함에 감읍하고 만다. 플라토닉 사랑이며, 내가 명명한 성스러운 사랑을 규정짓는다. 그래, 이런 사랑이 진짜야.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삶에서도 이런 사랑을 한 번 실천해보는 것이 어떤가.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여. 꿈꾸라. 부디 진정한 사랑을 실행해보라. 자, 지금 당장 당신이 할 수 있는 성스러운 사랑을 계획하고 구체적으로 구상하라. 그리고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한 편 자기 안에 안고 생을 마칠 수 있는 앞날을 살아내거라.
프랭크 도엘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읽고 흘리던 헬레인 헨프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 둘의 참사랑을 더욱 숭고한 단계로 올리는데 크게 기여한 프랭크 도엘의 아내로부터 받은 편지. 동안 오간 편지의 내용과 아날로그 세상을 숨 가쁘게 탈출하는 현세에 밀려 고서점은 사라질 것이라는 소문. 결국 문을 닫고 말 것이라는 프랭크 도엘의 고서점은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예감. 헬레인 헨프는 짐을 싸서 들고 런던으로 달린다.
고서의 낱장들이 바닥에 흐트러져있는 고서점에 헬레인 헨프가 와 있다. 런던. 바흐의 둔주곡이 흐를 듯싶다.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존 던'의 글을 낭송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문학 속의 영국을 확인하고 싶었던 헬레인 헨프의 다음 칼럼 내용이 충분히 예상된다. 책 '오만과 편견'을 읽고 싶어하는 친구, 배우의 희망 사항을 해결해 줄 크랭크 도엘은 곧 보내겠다는 소식을 끝으로 답글이 없다. '급성 맹장염' 끝 합병증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서점 구석구석 사람 냄새, 프랭크 도엘의 생이 짙게 스며있다. 안정과 유식, 박식과 해박, 나눔을 실천하는 데에 거침없었던 프랭크 도엘의 성스러운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서점에 헬레인 헨프가 머물고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남겨두었던 숙제를 해결한다. 나도 헬레인 헨프와 함께 고서점에 머물고 싶다. 그녀 옆에서 예이츠의 시를 낭송하여 프랭크 도엘의 영혼을 불러오고 싶다.
이 영화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소화할 수 있는 자라야만 진정한 영화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세상에 이런 것이 가능할까 하는데 진정한 사랑, 어떠한 첨단 세상이 와도 무너질 수 없는 참사랑의 모습을 수놓은 영화이다. 아름다운 영화. 이 세상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꼭 시청했으면 싶다. 바쁜 세상을 살아내느라 피곤으로 찌든 젊은이들에게 특히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아, 참. 여주인공 헬레인 헨프 역의 배우 '앤 밴크로프트'는 영화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을 유혹했던 그 아줌마라는 사실. '엘레인'의 어머니 '로빈슨' 부인 말이다. 앤 밴크로프트. 그녀는 온몸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지적 육체와 정신의 분위기를 퐁퐁 내뿜었다. 대단한 여배우이다. 안소니 홉킨스야, 무슨 말을 하랴. 이리하여 독서가이자 문장가 헬레인 헨프와 고서점 직원 프렝크 도엘의 못갖춘마디가 완성된다. 숭고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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