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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물이 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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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씐다.

 

 

평소 먹는 양의 대여섯 배가 넘게 물이 계속 마셔진다. 내 컴퓨터 보기용 안경과 똑 닮았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보통의 날과 다르다. 저녁이 이러면 아니 되는데. 이렇게 많은 물을 마시고 자는 날은 곱고 쉽게 잠에 취할 수가 없을 텐데. 평범한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을 계속 마시고 싶은 날. 이럴 때가 있다지만 오늘은 자야 하는데 큰 일. 어젯밤 딱 한 시간의 취침이었는데.

 

어쩌다가 한 번, 정말로, 거짓말 같겠지만, 일 년에 대여섯 번 라면을 끓여 먹는 날이면 발동하는, 물이 끝없이 당기는 날처. 그렇게 오늘 물이 당긴다.

 

 

내 컴퓨터 보기용 안경과 똑 닮았다. 저런 종류의 안경을 끼고 부지런히 문서 짜깁기를 했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월요일, 일 폭탄이 쏟아졌다는 사실을 점심 식사 후에 확인하였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지는 시각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별 의미도 없는, 잡일에 해당되는 일을 처리하기 시작하였다. 처리했나 싶었는데 덧씌워져 배달된 일이 또 한 겹 있었다. 했던 일을 부수고 다시 삿갓을 씌웠다. 추가로 내려온 일이 더해지니 방대한 양이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마저 하기 싫었다. 하라고 하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실었다. 전쟁 중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웠다는 이들의 부황기 꽉 찬 배처럼, 내가 만들어놓은 문서가 곧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더 버티고 있으면 정말이지 뭔 일이 나지 않을까 싶어 마감했다. 앞뒤 살피지 않고 끝냈다.

 

늦은 퇴근. 돌아오는 길, 늦은 저녁에 접어드는 시각. 막창 집에서 돼지 껍데기 구이에 소주로 입맛을 다시고 있다는 이의 소식을 듣고 자리에 합류했다. 사람에 대한 어떠한 감도 일지 않은 자리, 사람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저 돼지 껍데기로 저녁 식사를 치르기 위해 찾아들었다. 되도록이면 일체 절차를 만들지 않고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돼지 껍데기 구이를 처음 먹는 사람인 듯 처묵처묵, 마구 입 안에 구겨 넣었다.

 

말 한마디 온전하게 내뱉지 않고서 입만 채우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서 집에 돌아왔다. 아침 출근길에 시립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책을 한 권 가방에 넣어 갔다. 일터 책생에 올려뒀다가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채 뒀다가 그대로 다시 가방에 넣어왔다. 한 페이지, 한 줄, 한 낱말, 한 글자도 눈에 담을 수 없이 바빴다.

 

그는 내가 힘들 때에 내 앞에 기꺼이 소환된다. 이 남자를 한번 그려야 하는데. 프리드리히 니체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니체를 들으면서 퇴근했다. 불쌍한 니체는 불쌍한 말 앞에서 슬피 우는데 나는 입 안에 돼지비계 덩어리를 넣고 꼬깃꼬깃 구겼다가는 질그덕질그덕 잘게 부숴 삼키면서 세상을 질겅거렸다. 좁은 입 안에서 혼합된 염기와 기름기와 화기의 소용돌이 속에 물이 마려웠다. 나는 맹물, 찬물 속에서 호흡 멈추기 놀이를 하고 싶었다.

 

화덕 위에서 자리를 바꿔 선 말이 슬픈 눈으로 니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니체는 그 세상이 곧 그 세상이라면서 바스러졌다. 구원의 티끌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물을 내 몸뚱이만 한 무게로 입 안에 들이붓고는 자리를 떴다. 가만 나 혼자 뇌까린 후 집을 향해 몸은 돌렸다.

"물이 씐다."

 

오늘 저녁 식사용으로 내게 왔던 돼지고기 껍데기 구이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몸이, 입이, 세상살이에 질려 부대낄 때 물을 찾는다. 내 어머니 또한 늘 그러셨다. 

"아이고, 뭔 세상이 이런다냐. 물이 씐다. 물 좀 도라야."

아마 내 어머니의 입이 계속해서 물을 찾는 것은 내 어머니 먹을 것이 없어서, 혹은 부족해서 짜디짠 김칫국물로  쓰디쓴 세상을 입 단속했기 때문이리라. 우선 당기는 입맛 달래느라 짜디짠 간장조림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오래된 묵은 찬들 꺼내어 식구들 몰래 한 입 하셨을 거다. 아깝기도 하셨을 거고.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엄마가 명란젓을 담던 모습.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가 담은 명란젓의 맛을 찾을 수 없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 어머니도 숨겨놓고 드시는 음식이 있었다. 몇 수십 번 발효된 온갖 종류의 젓갈들. 젓갈도 젓갈 나름인데 말이다. 

 

더위에, 일에, 온몸을 다 바친 하루를 접으면서 물 씐 하루를 돌아본다. 물이 씌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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