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뒷산에 오를 때가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였다.
집을 나와 왼편 골목으로 가면 높은 곳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좁은 내를 이루고 있었다. 내를 건너면 뒷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지막하게 산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곧장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걸음 하면 산 아래 우리 밭이 있었다. 내 어린 마음에 '저 드넓은 밭이 우리 것이구나.'하고 뿌듯함을 느낄 만큼 꽤 넓었다.
가끔 그 방법으로 밭에 가시는 엄마를 따라가곤 했다. 그 길은 엄마가 농사일을 적게 하려고 마음먹을 때 걸음하시는 것이었다.
아마 이맘 때 쯤이었을 것이다.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 밭보리가 자라던 시기였다. 밭에서는 날씬한 몸매의 보리들이 잔뜩 삶의 기운을 물고서 하늘로 하늘로 몸을 치솟게 하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너무 강하게 성장하려는 욕심에 불이 붙었는지 지나치게 키를 키우는 것들도 있었다.
자라나는 보리밭 속에서 어머니는 미리 좀 나와서 아직 어린 보리 몇을 뽑아 '보리된장국'을 몇 끼 더 끓여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곤 하였다. 보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잘 자라'라는 말씀을 전하시던 어머니는 밭에 계시는 동안 딱 한두 번 정도 두 판을 허리 뒤에 올리며 흐리튀튀한 하늘을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중 첫 번째 행위에서 꼭 하시던 '단골 메뉴'의 말씀이 있다. 보리밭에서 눈을 들어 잠시 후 몸과 함께 일으킨 눈을 산으로 올려보면서 하시던 말씀이었다.
"영판 좋다. 영판 좋아."
무엇이 좋은지를 별도로 지목하지 않으셨지만 함께 있으면서 어머니의 시선이 멈추는 곳을 함께 한다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진달래'였다.
뒷산은 분홍 진달래 천지였다.
연분홍 진달래꽃이 환한 수채화의 산을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었다.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가져옴
영판 : 아주
‘아주’의 의미로 ‘영판’을 쓰는 경우가 있으나 ‘아주’만 표준어로 삼는다. <표준어 규정 3장 4절 25항>
'문학 > 내 어머니의 언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것 참 영판 좋네. -'영판' 2 (2) | 2022.04.04 |
---|---|
고샅에서는 늘 조심하거라 (4) | 2022.03.26 |
솔찬히 나왔구나. (5) | 2022.03.19 |
잔상 말도 안 듣는다 (5) | 2022.02.22 |
쬐깐 걸져 보이는 것도 괜찮지야 (3) | 2022.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