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내야지

반응형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내야지

 

늘 위 검은 사람처럼 미술관에 서 있고 싶은데~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걸렸다. 딱 걸렸다. 오늘 내게 작용한 생의 법칙은 ‘머피의 법칙’이라고 해야 하나. 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쪽 그 계통이다. 그토록 날을 가리고 또 가리느라고 가렸는데 하필 오늘이었다. 일의 진행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이 꼬였다. 제법 큰돈을 주고 산 물건이 오늘 도착했다. 물건을 산 시기는 제법 되었다. 남자가 전혀 관심 없는 일을 내가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해 왔다.

 

물건을 구입하고 그가 집에 없는 날을 택해서 물건을 받으려니 했는데 느닷없이 내게 판매한 상대방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죄송합니다. 더는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규칙입니다.”

“아니, 한두 주일만 더 연장할 수 없나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규칙입니다.”

“이런 유의 물건을 거래하는 다른 가게에서도 그런가요?”

“예. 그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닐 텐데 왜 ‘그럴 것입니다’를 거쳐서 ‘그렇습니다’가 되나요?”

“죄송합니다. 어쨌든 안 됩니다. 이번 주에는 배달에 들어가겠습니다.”

“예. 할 수 없네요. 그렇게 해주십시오.”

 

오늘이 배달일이었다. 아침 일찍 로션을 바르다 말고 유튜브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지나가는 투로 던진 아침 문장이 다음이었다.

“오늘 오후에 술 마심? 골프 함?”

“아니, 집에서 저녁 먹을 거야.”

“왜, 금요일인데 술을 안 마심?”

“알았어, 찾아볼게.”

“아니, 그냥.”

이를 어쩐담. 배달일이 어제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어제. 내게 물건을 매도한 곳에서는 지방으로는 금요일에만 배달한다고 했다. 이런, 어쩌자고 지방민에게만 너희들 맘대로 이냐. 호통이라도 치고 소리라도 지를까 싶어졌다. 받아놓은 밥상을 어찌한담.

 

피자 한 조각이 먹고 싶다는 나의 외침에 기꺼이 전자렌지에 피자를 뎁혀온 그의 행위로 이미 우리의 엇갈린 행보는 끝난 것이다. 늘 그렇듯이!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오전에 배송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좀 일찍 오겠다는 것을 일터 업무 시간을 대어 어제 해 왔던 약속 시간대로 미뤄뒀다. 걱정이 시작되었다. 딱 오늘 오전 전화를 받은, 그 시간 이후 나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물론 미미했다. 왜? 늘 그러했으니까.

 

나는 아마추어 미술작품 컬렉터이다. 컬렉터. 갖고 싶은 직업이었다. 직업? 그래, 직업. 도슨트라든지, 큐레이터랄지 그리고 화가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느끼고서 나는 결국 내 꿈을 급회전시켰다. 있는 돈 없는 돈 아끼고, 아끼고 또 아껴서 그림 작품을 사자. 사 왔다. 자연스레 나의 취미가 되었다. 아마 이것저것 합해서, 유명 작품이든지 순수 아마추어 작품이던지 간에 어쨌든 모은 작품이 아마 70여 점은 되리라.

이러도록 남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짐이 쌓여가는데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언젠가 한 번 친정 식구들과 모여있던 날 술김에 그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그림말이야. 그것들 모두 팔면 얼마나 돼?”

강남과 판교에 사는 언니들 앞에서 쫄고 있던 시골 촌순이, 소규모 부동산과 금융으로 가까스로 자가 경제를 운항 중인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물어? 그만, 그만해.”

“그만, 그만? 대체 얼마 투자했으며 모두 팔면 얼마냐고. 혹시 그것들 초고가인 것 아냐?”

황당해진 내가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대화 내용을 확 돌렸던가.

 

나는 이후 어쩌다가 한 번씩, 아주 가끔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가격대가 대충 맞으면 작품 구매를 시도했다. 경매에서 성공하면 그것으로 끝. 작품 구매가 끝난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 또한 빤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마음 편하게 ‘가끔’의 박자로 작품 구매를 계속해 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통이 커졌다. 그저 그러려니. 어떻게 작품 배달 현장과 만나게 되면 그러나 보다고 하겠지. 마음 편했다. 이 남자도, 나의 남자도 초등학생 수준의 그림 실력이지만 예술에 대한 감각이 있구나 싶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쫌생이였다. 약속된 배달 시각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갖고 싶었던 그림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해하고 즐거워야 할 것을, 나는 그만 불안해졌다. 여러 상황이 상상되었다. 다만 그는 금요일 그 시간에 집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든하게 내 사고의 범위에 밀고 들어오면서 나는 또 한편 마음 평안해졌다. 어서 작품들을, 이동이 편한 드로잉 작품 한두 개는 일터에 가서 자랑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올해 들어 가장 빠른 퇴근 시각이었을 것이다. 좀 빨리 넣을 것을 그랬다. 남자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별일 없는데, 금요일이므로 나는 빠른 퇴근을 하고 금요일이므로 저녁에 먹을 음식에도 관심이 있는 것처럼.

“어디야?”

“응, 곧 집에 갈 거야.”

“아니야. 며칠 전에 오늘 저녁 친구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같아서.”

“매일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 어제 찐하게 마셨는데, 뭘. 오늘은 집에서 먹을 거야. 어디야?”

“퇴근 중.”

“벌써? 알았어. 나도 곧 갈 거야.”

“오늘 뭐 먹음?”

“걱정하지 마, 피자도 있고 만두도 있고~”

“알았어.”

 

알았다는 내용으로 전화를 마치고 귀가하는데 이때부터 불안해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집이람. 아니 오늘은, 금요일은 당연히 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저 남자의 취향 아냐?

금요일이어서 으레 하는 전화처럼 그렇게 넣었던 전화인데 후폭풍이 대단했다. 불안했다. 가슴이 통개통개 뛰었다. 내처 자연스럽게, 평소 하던 식으로 대화를 만들어나가느라 온몸이 붐비기도 했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집에 도착하면 내가 먼저 집에 있을 거야. 먹을 것 쌨어(많아).”

이 친절한 정리용 마감 대화가 나를 확 붙잡았다. 이를 어쩌나. 계산해 보면 딱 그때 집에 도착할 시간인데. 남자가 집에 들어올 시간, 내가 내 그림과 현관 앞에서 만나게 될 순간. 부디 현장을 만나지만 않았으면. 그가 먼저 들어가 있고 나는 조용히 들고 들어가 현관에서 바로 연결되는, 그림이 들어차 있는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그림을 조심히 모셔놓을 수 있는 시간만 마련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 내가 퇴근길 중앙 지점에서 대화했으므로 나보다는 더 늦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상대는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더니 집 앞 건물 현관에서 전화를 넣으니 다른 아파트에 있었다. 옥션 나의 방 주소창에 나의 주소가 수정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우리 집 바로 아래 위치한 아파트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시간이면 충분히 그림을 넣을 수 있는 시각이었다.

“아, 아니 되는데. 집 앞에만 차가 바로 서 있었어도.”

 

그림은 두 작품이었다. 크기는 대략 15호에서 20호로 비슷했다. 한 작품은 그림이 뚜렷이 보이는 캔버스 위에 완충용을 겸한 포장용 비닐 포장지로 덮어 씌워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제법 값나가게 느껴질 만큼 상당한 무게의 액자 안에 있었다. 완충제로 둘러싸인 값싼 기성품 같은 작품을 배송자가 내게 건넬 즈음 건물 저쪽으로부터 낯익은 사내가 걸어왔다.

“벌써 왔어? 뭐 해?”

곧이어 아무것도 모르는 배송자가 살뚱맞은 표정의 눈으로 나와 남자에게 두 눈을 번갈아 가면서 맞춰줌과 동시에 작품 증명서가 든 사각봉투를 내게 전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집 주소가 처음 거래할 때 그대로인 것 같네요. 올라가면 수정하라고 이야기를 할게요.”

“뭐 해?”

“올라가, 먼저 올라가.”

이번에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나에게 구꿈 맞은 두 눈을 던지면서 남자가 외쳤다.

“뭐야?”

“아냐, 올라가, 먼저 올라가라고요.”

 

낌새를 확 느꼈나 보다. 인상을 팍 긁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배송자는 무척 친절하게 내게 말했다. 다시 또 한 번!

“죄송해요. 몇 번 거래하셨는데도 왜 주소 수정이 되지 않았을까요? 올라가면 꼭 수정하라고 할게요.”

“예. 잘 알겠습니다. 문 앞에까지만 배달해 주세요. 그럼 집에는 제가 가지고 들어갈게요.”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할게요. 참. 사인을 해주시고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완전한 꾸부리 자세로 사인을 했다. 엘리베이터는 쭈우욱 우리 집 층수까지 상경했다. 순간이었다. 현관 앞에 대똥 무거운 작품을 세워주고 배송자는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남자의 표정이 생각났다.

‘저렇게 하는 것이었군.’

고요 버전으로 움직였다. 신발도 벗지 않고 그림 창고 비슷하게 존재하는, 가끔 아주 가끔 내 아이의 방이었다가 또 한양에서 하산한 언니의 방이 되기도 하는 작은 방 벽에 그림 둘을 세워뒀다.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의 통화였다.

 

나는 그만 외출복을 벗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맹하니 컴퓨터를 켜고 이곳 블로그에 들어왔다. 오늘의 글을 읽고 새 글을 올리셨다고 느껴지면 바로 가서 읽는 한 블로그 친구님의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무청을 길게 걸어놓은 사진 아래 참 고운 내용의 시가 올려져 있었다. 오전에 이미 읽은 내용이지만 천천히 다시 읽었다. 이 시를 쓰신 분은 아마 참 차분하시리라. 딴생각을 하려 애쓰는 사이 남자가 내게 가까이 오면서 말했다.

“왜 자꾸 그림을 사는 거야. 얼마야?”

남자는 그림 방으로 냅다 걸어 들어갔다.

“이것은 돈 백 되는 거야? 그러면 이것은 한 오백 되려나?”

‘어, 그림값을 아네. 내가 속으로 외쳤다.’

“말 좀 해 봐. 무엇을 하려고 그림을 계속 사는 거야?”

“나중에 내 아이에게 주려고.”

“엥? 아이가 이걸 모두 걸어? 그리고 이것들 사두고서 포장도 벗기지도 않고 있잖아. 그런데 왜 사는 거야?”

“내가 가끔 꺼내서 보고 있어.”

“아하, 그래? 근데 이것들 모두 사는 데에 얼마나 돈이 들어갔어? 그리고 팔면 얼마나 됨?

“.......”

“판로를 내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장 뭔 일 있어 봐.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는 것 아냐?”

‘이런 무식.’

 

침묵이 흘렀다. 식당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가 내 쪽을 향해 말했다.

“어서 저녁 먹어.”

“매생이국 좀 덜어줘. 피자 한쪽도 먹고 싶어. 피자 한쪽도 먹고 싶다고.”

전자레인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데운 피자 두 조각이 식탁에 올려졌다. 김치에, 비트 조각 김치에 청양고추와 된장에, 매생이국에, 그렇게 가벼운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이어 피자 한 조각씩, 견과류 몇 개씩을 더해 섭취했다. 나는 자꾸 내가 좋아하는 시인 안도현의 시 ‘매생이국’에 가락과 리듬을 올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커다란 눈물 족족 흘리면서 말이다.

 

잠시 후 늘 우리 둘이서 해온 방식으로 일상은 진행되었다. 침묵. 대화 끝.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한 시간여 보냈다. 남자가 집을 나서려고 외투를 들고 일어섰다.

“어디 감?”

“어, 어제 빌려서 입고 온 외투 가져다주려고.”

“그래? 그럼 차 끌고 가. 언니가 좀 데리러 오래.”

“알았어. 차 가지고 갈게. 언니한테 전화 통화를 해서 내게 알려줘.”

예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식당에 초빙되어 김장김치를 담아주러 온 언니를 데리러 간 남자는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의 한 통 가득 담긴 김치를 안고 집에 들어왔다. 뒤늦게 들어온 언니는 두부 두 모와 함께 막걸리를 한 병들고 있었다. 두부보쌈김치를 위한 두부 데우기가 시작되었다. 잠시 후 식탁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부와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맛이 어때요? 짜지 않아요?”

“안 짠데요. 괜찮아요.”

“김장김치인데도 참 부드럽네. 맛있어. 근데 벌써 김장을 해?”

“오, 이거 회사 것이 아니야. 회사에 청소해 주시는 언니가 자기 집 김장했다고 주신 거야. 자기가 직접 기른 배추로 담았대. 참 고맙다.”

“그래, 고맙네. 참 맛있어.”

 

막걸리는 언니와 남자 둘이서 마셨다. 나는 꾹 참았다. 오늘, 그만 대개 꼬이고 만 하루 일정으로 인해 생긴 이 감정을 온전히 받아 안고서 밤을 지새우고 싶어졌다. 이 이상야릇한 기분. 뭐랄까. 내가 소중히 여겨 산 이 미술품들이, 나 죽고 나면 나중에 쓰레기가 된 들 어떠하랴 싶어지기까지 하는 이 야릇한 기분. 저 아래 지축을 지탱시키는 묵직한 기분에서부터 하늘로 금방 승천할 것 같은 붕 뜬 기분까지. 온갖 감정을 모두 만나는 듯한 이 기분. 이상한 것은 시간은 계속 가고 또 일상은 늘 그런 듯 안 그런 듯 지나가는데 내가 맛보는 감은 끝없이 확장되고 다중성을 띠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쨌든,

“아, 오래도록, 절대로 쓰레기통에는 버려지지 않도록, 내 그림들을 돌보려거든, 나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아야지. 살아내야 한다. 단단하게, 꿋꿋이.’

 


매생이국

                            - 안도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 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시선 283 / 창비 / 2007.1.21. 초판 1쇄) 76쪽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