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마지막 브러쉬 스트로크의 다른, 그리고 그 사이의 감정을 나도 잘 안다.
I can imagine the different emotions of the first and last brush stroke. - and those in between.
인스타그램을 가끔 본다. 가끔이 아니다. 나의 한 달 생활 100% 중 적어도 10%는 차지할 것이다.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대부분은 음악과 미술 분야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의 아침 시간을 제법 할애하여 많은 그림과의 만남으로 보냈다. 내가 팔로잉을 하는 대부분은 세계 각국의 미술인이다.
인스타그램 미술 작품 읽기를 통해 폴란드 화가 작품의 구매를 서두르고 있기도 하다. 연필과 펜, 목탄 드로잉 소품을 점찍어뒀다.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작품들에 나는 깜빡 반하고 말았다. 폴란드의 여성 화가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로도 그녀는 멋진 화가이다. 번역기의 힘으로 수십여 차례 메시지가 오갔다. 그녀의 작품을 구입하기로 약속하였다. 가격 합의도 했다. 현재 최종적으로 작품 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작품 구입을 위하여 일본으로의 소화제 직구를 서둘러 실천해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어제 소화제를 받았다. 페이팔을 통한 미술 작품 직구에도 힘이 생겼다.
오늘 아침에는 작품보다 댓글이 나를 붙잡았다. 추상화였다. 캔버스 전면을 일정한 사각형으로 나누어 화이트 아크릴 물감 혹은 화이트 유화 물감을 나이프로 채워가는 그림이었다. 많은 세월, 그리다가 말다가를 반복해 온, 사이비 아마추어 미술인인(이것도 글쎄, 그 정도가 되는가 싶지만) 내게는 그다지 내 눈을 붙잡을 만한 그림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옥션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이 단순, 반복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추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시류를 따라가는 내가 싫다.(일부 가까운 지인은 이런 내게 '지 ㄹ ㅏ ㄹ 떤다'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술 분야의 특징이랄 수 있는 '반복'과 '단순화'는 '강조'를 통한 집중과 몰입에 중점을 둔다. 쉬운 이해와 빠른 속도로 친숙해지는 즐거움과 관객의 심중을 뚫고 들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각인 효과 등을 지닌다. 이어령 선생님의 책에서 비롯된 신조어인 '디지로그(DIGILOG)'는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의 두 힘이 모아질 때 진정한 디지털 시대인의 자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손을 직접적인 도구로 활용하는 미술 작품은 '디지로그'의 참 힘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영역이다. 오늘 내가 댓글로 인해 오래 머물렀던 작품이 그에 걸맞은 작품이었다. 단순한 유행이나 실험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릴스 더 보기' 등으로 작품 제작과정까지 감상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에서는 구체적이면서 정성 깃든 작품 제작과정이 관객들의 심중을 더더욱 쿵쾅거리게 한다. 그러나 오늘 만난 작품은 그림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상을 한번 꺾어 보는 데에 재미 들려 사는 나에게는 그 작품이 단순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온정신이 관심 표명을 할 만큼 독창적이지 못했다. 다만 작품 아래 작품에 대한 호감도를 표명한 빨간색 하트 표시의 숫자가 내 눈을 붙잡은 것이다. 이어 댓글 수도 확인하게 되었다. 제법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 중 서너 번째쯤 자리한 댓글을 읽어보다가 그만 저격당하고 말았다. 작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품 아래 매달린 일반 대중의 올린 댓글에게 당한 것이다. 의미있는 당함이었다. 순간 회오리바람이 되어 하늘을 향할 정도로 정통 저격이었다. 확실한 의미 파악을 위해서 '번역하기'를 가동하였다.
처음과 마지막 브러쉬 스트로크의 다른 감정을 상상할 수 있다. - 그리고 그 사이의 감정을. I can imagine the different emotions of the first and last brush stroke. - and those in between.(이 댓글을 쓴 이를 놓치고 말았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 그만 스크린 샷을 못 하고 말았다. 작품명도 놓쳤다. 이를 어쩐담. 혹 저작권 침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외국인 인듯 싶은데. 아, 찾았다. 인스타그램 steven. warburton.art님이 piersphillips님의 작품에 붙인 댓글이다. )
문장의 의미가 내 영혼을 뒤흔들었다. 감탄의 환호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심지어 환호 아래 짧고 굵은 어떤 것이 매달려서 함께 치솟았다. 감읍의 눈물까지 한 방울 내비쳐야 했다. 아마 내가 가끔 '나, 이렇게 그림을 그립니다.'라고 블로그에 올릴 만큼 그림 제작과정을 경험하고 있어 가능한, 사로잡힘일 것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누구에게도 이 문장은 읽는 이의 가슴에 충분히 가 닿을 수 있는 문장이며 의미였다. 읽는 이의 생에까지 확대되어 생각하게 할 글이다.
스트로크란 무엇인가. Stroke는 그림을 그릴 때 연필이나 붓 등이 화면에 닿았다가 떨어지기까지의 움직임 전부를 말한다. 여기 작품 감상 후 댓글에서는 미술 작품 제작과정의 모든 손놀림을 말한다고 하겠다. 작업의 시작에서 끝까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손놀림이 함께 갈 때 미술 작품은 그 제작과정이 가능하고 완성에 이를 수 있다.
나의 경험을 근거로 말한다. 스트로크는 그때그때 그 맛이 다르다. 작품이 시작될 때의 기대감과 신비감으로 인한 마음 떨림을 순수 절정이다. 그 맑고 정한 기운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지고지순한 순결함이다. 점차 작품이 진행되면서 느끼는 감은 또 끊임없이 몸을 사리면서 변한다. 논설문에 서론, 본론, 결론이 있듯이 그림에도 초장, 중장, 종장이 있다.
초장에서의 순진무구함을 지탱하기는 쉽지 않다. 손의 상태와 마음 상태는 함께 가기가 쉽지 않다. 티끌이 침범한다. 이 일 저 일 마음 속에 쌓여있던 잡것들이 스트로크의 원만한 진행을 방해한다. 마치 보란 듯이 힘 자랑을 한다. 가지각색의 잡념들은 활개를 펴고 작가를 자극한다.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멈추면 다행이다. 미술 작품이라는 것이 수학 공식이 아니다.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창작이다.
완성을 향한 손놀림을 마음이 지배하는 것은 난감하고 때로 난해하다. 매 순간 변화하는 작품은 또 작가의 의도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그 틈새를 좁혀가는 능력이 어쩌면 작가가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게 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댓글은 'I can imagine the different emotions of the first and last brush stroke. - and those in between.'이라는 우아한 표현으로 관객인 나의 심중을 두드렸다. 번역기 또한 얼마나 훌륭한가. '처음과 마지막 브러쉬 스트로크의 다른 감정을 상상할 수 있다. - 그리고 그 사이의 감정을.'
그림은, 특히 현대를 풍미하는 그림들은 단순한 그림 제작 기법에 능숙하다고 해서 온전한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아이디어의 싸움이다. 어떻게 하면 나만의 작품을 제작하느냐가 성공의 관건이다. 그러면서도 대중을 혹하게 하는 획기적인 방법이거나 내용이 담겨져야 한다. 철학이든지 기법이든 상업성이든지 어느 한쪽으로는 제대로 된 어필을 해야만 한다.
인기 영합에까지 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지점, 보편적으로 일반 대중 속에 녹아들 수 있는 포인트를 자기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어야 한다. 마니아 팬을 짱짱하게 거느릴 수 있든지, 아니면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야 할 수도 있다.
캔버스나 화지에 첫 동작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제스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중간 지대에서 지루해지기 일쑤인 작가를 꼭 잡아맬 줄 아는 힘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마침내 화룡점정의 순간까지 견고하게 인내해야 할 감개무량의 무게를 누가 알랴. 액자가 제작되고 액자 앞뒤 틈새에 작품이 끼워지고 갤러리에 작품이 걸리거나 어느 마음 풍족한 이의 집 거실에 자기 작품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을 어느 누가 정확히 확인할 수 있겠는가. 미술 작품 제작이야말로 인생 한살이와 맥을 같이 한다. 각각의 작품이 인생 소품이랄 수 있다.
한 달이 넘었는지, 두 달을 넘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은, 내가 현재 그리고 있는 작품이 떠오른다. '내사랑 히스 레저5'이다. 말하자면 히스 레저를 다섯 번째로 그리고 있다. 왜 멈추게 되었는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냥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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