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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홀로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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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걷다

 

영화의 한 장면. 유대인 남자들이 머리에 쓴 저 특유의 것은 무지 비싸다고 한다. 어떤 동물 한 마리의 털이 필요하다는데, 어제 알고 오늘 잊었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다큐멘터리

미국

헤이디 웨잉 감독

레이첼 그레디 등 출연

 

어제오늘 알고리즘은 나를 계속 <히시디즘>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히시디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군으로부터 당한 인종 청소정책을 가까스로 벗어난 동유럽(특히 헝가리) 유대인 난민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혼돈의 상황을 가까스로 통과하여 미국의 한 지역에 생존의 터전을 일궜다. 그들은 끔찍한 히틀러 사단의 짓에 놀란 나머지 세상의 운행, 어쩌면 지구 자체의 운행에 등을 돌려버렸는지 모른다.

그들은 벽을 쌓았다. 자기들만의 규칙으로 성벽을 쌓았다. 자기네들만의 규범으로 외부인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자물쇠를 꽂고 문을 걸어 잠궜다. 세속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이디시어’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소통한다. 특유의 헤어 스타일을 해야 하며 다른 남자에게 정수리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범으로 여자들은 혼인 후 바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공동체에서 마련한 가발을 써야 한다. 여자들은 노래도 부를 수 없고 춤도 출 수 없다. 여자는 아리는 낳고 기르는 육아 담당 신체에 머물러야 한다. 전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뉴욕주의 부루클린 어느 지역에 <히시디즘> 공동체가 있다.

<히시디즘>이 흔들리고 있다. 오늘 새벽 세 시 가까이 시청을 완료한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도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었다. 오늘 시청한 이 다큐멘터리는 팩트로 구성되어 있다. 어젯밤에 본 ‘그리고 베를린에서’와는 또 다르다. 현실이다.

19세였던가 한 총각이 유대인 특유의 헤어 스타일에 가위를 댄다. 양쪽 귀 옆으로 내려뜨린 길게 꼬아 늘어뜨린 머리카락 두 줄기를 자른다. 그는 세상으로 탈출한다.(그의 말에 의하면) 세상을 알고 싶었다. 디지털도 모르고 핸드폰도 잘 모르는 자기 모습은 거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신체 폭력 및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

적응은 쉽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도 세상살이에 서투른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도피성 행위에 뛰어든다. 코카인 흡입. 여러 차례 반복되고 결국 재활 센터에 넣으면서 했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본다.

‘과연 어느 곳이 내가 살아갈 공간인가?’

18세일 것이다. 남자의 얼굴도 모른 채 공동체의 규약으로 결혼했던 한 여인은 아이들 셋과 함께 공동체를 탈출하고 한다. 남편의 폭력을 견딜 수 없었다. 가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단위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옥죄여 오는 남편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지만 그녀를 지원하는 단체(히시디즘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는 힘이 없다. 돈 많은 히시디즘에 내세운 강력한 변호인단의 증인으로는 친정의 혈연들이 등장하여 그녀를 향해 욕을 퍼부었으며 절친이었던 이웃 여인네는 공동체의 명령을 받들어 그녀를 공격한다. ‘배신’이라는 낱말을 쏟아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증오하도록 자식들을 길렀다고 자식들을 키울 수 없게 된다.

이십 대 중반을 사는 한 유대인은 차량을 개조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는 연기를 하고 싶어 한다. 많은 오디션을 보는데 세속의 순환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지를 못해 늘 거기서 거기를 헤매고 있다. 히틀러의 유대인 청소정책에 놀란 유대인은 나이 열댓 살만 되면 결혼을 시켜 아이를 낳게 한다. 나이 스물 되기 전에 이미 자녀들이 서넛은 된다. 그도 세 아이가 있다. 지닌 사진들을 펼쳐놓고 말한다.

“아마 이 아이가 큰 아이일 것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잘 자라고 있다더군요.”

 

공동체에서 그래도 이들을 상담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에게 공동체에서 탈출을 꿈꾸는 이들이 말한다.

“사랑이 궁극적인 진심이다. 삶의 참 목적과 의미를 원한다. 나는 언제나 그것을 찾아 살 것이다.”

“불안하다. 쉽지 않다. 완전한 세속에의 적응이 아직은 불안하다. 공동체며 랍비며 나를 강간한 교장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르겠다.”

“엄마,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행동으로 옮기면 우리 자신을 넘어설 수 있을 거예요. 무너져서 계속 울고만 싶은데 참고 있어요.”

“딸아, 너는 매일, 너 자신을 넘어서고 있어. 근사하게 살아내서 너를 넘어서야 해.”

 

공동체를 대표한 상담자가 말한다.

“잠이 안 와요. 공감이 필요하다 싶어져요. 우리 공동체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고통을 떠안고 살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돌아오게는 해야 합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뭘까. 끝없는 핍박을 살아낸 유대인도 참 안타깝다. 오죽하면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해 번식을 위한 온갖 노력을 다하겠는가. 역사책을 펼치면 도대체 이토록 세상을 번거롭고 요사스러운 마당으로 만든 악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참 궁금하다. 나는 어느 특정 종교인이 아니기에 그 미궁이 더욱 신기할 따름이다.

 

<히시디즘>이 어느 정도 융통성을 좀 발휘했으면 좋겠다. 공동체라는 것이 최대한 구성원의 생각을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돌쇠라는 사람도 있고 갈쇠라는 사람도 있고 흑쇠라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돌쇠에게만 맞춰 살라고 하면 어찌 각 개인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개인의 생각을 짓밟는 것은 히틀러가 했던 짓과 뭐가 다른 것인가. 결국엔 그 짓이 그 짓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 이런 내 생각이 평생 토라의 세계를 파며 사는 그들에게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생각이겠는가마는 어제 내가 시청한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그 여주인공처럼 각자 지닌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사는 세상을 펼치는 것이 옮은 것이 아닌가. 사람이라면 마땅한 것이 아닌가.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내 생을 돌아보매 참 다행이다.

 


참 이 글에서 사용한 용어 <히시디즘>은 찾아보니 하시디즘 [ Hasidism ] 이라 명명하는 것 같다. 나는 영화 자막을 그대로 따라하여 <히시디즘>으로 쓴다. <종교학대사전>에 의하면 <하시디즘>은 하시디즘 [ Hasidism ]은 헤브라이어의 hasid(경건한 자)에서 유래한단다. 유대종교사상에서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고 한다. 특히 좁은 의미로는 18세기 초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대중 사이에 널리 퍼진 성속일여의 신앙을 주장하는 종교적 혁신운동이다. 

 

창시자는 <좋은 이름의 주인(Baal Shem Tov)>이라는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 (Istael ben Eliezer, 1698~1760)라고 한다. 하시디즘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한 지식계급에서는 미신적인 것으로서 경시되었는데, 부버에 의해서 다시 그 깊은 종교적 의미가 발견되어서 재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하시디즘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한 지식계급에서는 미신적인 것으로서 경시되었는데, 부버에 의해서 다시 그 깊은 종교적 의미가 발견되어서 재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옅은 내 지식으로는 무엇을 취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 글은 다큐멘터리에서 얻은 정보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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