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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쓰리 빌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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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 왜 광고판이 세 개일까?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그녀를 참 좋아한다. ‘프란시스 맥도맨드’. 그녀는 자기 신체와 신체에서 우러나는 정신의 합 자체가 영화배우이다. 하늘이 내린 명령을 그녀는 제대로 산다. 지나친 억지인가? 아니다.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제대로 영화배우가 지녀야 할 기운이다.

 

참 오랜 세월 이 영화 시청을 위해 고민했다. 개봉 당시 봐야 했던 것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번 연휴. '지니 tv(옛 메가 tv)'의 '쓰리 빌보드'며 유튜브의 '쓰리 빌보드'는 여전히 6,000원을 넘게 결재해야만 시청할 수 있었다. 2천 원 대로 낮아질 것을 그리 기도했건만 결국 나를 꿇어 앉혔다. 결국 '쓰리 빌보드'와 '브이 포 벤데타'를 유튜브에서 구매했다. 물론 모두 시청했다.

 

왜 세 개의 광고판을 띄웠을까. 누구를 향한 메시지일까.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분한 여주인공 밀드레드는 1남 1녀의 자녀를 가졌다. 19세 소녀에게 남편은 뺏긴 채 장식품 가게를 하는 그렇고 그런 미국 어느 지방의 서민이다.

 

그녀가 어느 날 집 가까이 있는 광고회사를 찾는다. 1년 광고를 계약한다. 대로변에 세 개의 광고판이 있다. 각각 어떤 내용이 실렸을까. 밀드레드는 강간을 당한 후에 살해된 딸의 가해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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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제임스 딕슨은 그런 밀드레드를 꼬집는다. 그는 마마보이이다.

'우리 경찰이 얼마나 더해야 하냐? 찾아지지 않은 가해자를 어찌하라는 것이냐. 어쩌란 말이냐?'

의 방식이다. 그는 광고주를 찾아가 폭력을 행사한다. 이를 본 밀드레드가 가만히 있었겠는가. 경찰서에 불이 나고 광고판 셋도 불에 탄다.

 

경찰서장 월러비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상태이다. 시한부 인생. 경찰서장은 광고판을 보고 말한다.

“광고 내용은 알맞은 내용이지만 너무 했어."

서장 월러비는 암으로부터 더는 희망이 없는 것을 선고받으면서 세상을 등진다. 죽음.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 분)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아내에게 남긴다.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게 될 거야. 만일 천국이 없다면 당신과 있었던 이곳이 천국이었어.”

정상적인 사람이다. 이런 문장을 아내에게 남긴 사람이므로 그는 자기 죽음으로 악의 순환을 잠재우고자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분노를 잠재울 방법이 없는, 강간을 당하고서 죽어간 딸을 둔 엄마 맥도먼드에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긴다. 익명으로 5천 달러를 임대료로 기부하면서 말이다.

“나도 경찰 놈들 밥맛이에요. 그러니 힘내요. 당신을 응원하는 친구가.”

 

죽은 자신을 대신할 사람에게도 유언을 잊지 않는다. 윌러비가 막무가내형의 경찰인 딕슨에게 남긴 말이다.

“네 안의 화를 내려놓아. 분노를 버려. 너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다.”

 

아울러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 악의 순환고리를 끊기 위한 노력도 해낸다. 아내를 시켜 맥도먼드에게 편지를 전하게 한 것. 남편의 진중함을 전하는 아내는 다음 문장으로 현재 얼크러진 채의 혼돈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애써 가라앉힌다.

“아니요. 단지 편지를 전해주러 온 거예요.

미드레드가 품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고려한 답변이다.

 

경찰서정 월러비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밀드레드에게 준 ‘희망’과 딕스에게 쓴 ‘사랑’과 아내에게 쓴 ‘천국’으로 말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밀드레드의 남편과 사는 18세, 아니 이제 19세가 된 여인 페놀로페의 입을 통해서 내놓는다.

“분노는 더 쿤 분노를 낳아요.”

 

밀드레드의 경찰을 향한, 세상을 향한 증오는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어느 날 우연히 맥주 바에서 들은 어느 강간범의 고백을 밀드레드의 딸에게 일어난 사건의 그를 범인으로 확신한 딕스. 밀드레드는 다음과 같은 그녀의 생각을 기억한 딕스와 함께 딸을 범한 강간범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차를 모는 딕스를 따른다.

“당신이 더러운 짓을 안 했다고 해도 더러운 걸 보지 못했다 해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으니까, 당신은 죄가 있어요.”

 

밀드레드. 그녀는 과연 딕스와 함께 강간범에게 가면서 그를 죽일 것인지 말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I guess we can decide along the way(가면서 결정할 수 있을 거야)”

모쪼록 살려둬서

“(엄마가 일을 저지르면, 즉 집을 나가면) 이제 우리 집에 미친년은 없다.”

고 말한 아들의 말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다. 강간범을 죽이는 것은 실현되는 것이 차라리 옳은 일이다. 아, 아니다. 오직 아들을 바라보면서 사는 딕스에게도 또 이는 아니다. 희망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곱씹는 딕스도 다시 돌아와 멋진 경찰로 다시 살아내기를 기원해야 한다. 맞는 말인가? 딕스는 밀드레이를 싣고 떠나면서 말한다.

“어머니가 그랬어요. 희망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래, 스스로 자기 생을 끝낸,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었던 윌러비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광고판에서 나에 대해 적은 것은 매우 유감이었어요. 당신이 내가 당신 딸의 사건에 내가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러나 당신의 광고는 옳았어요.”

아, 밀드레드에게 기어코 강간범을 찾아내어 즉각 사살하라는 말을 남길 수 없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제발 ‘잉태’의 순간 인간들의 뇌세포를 정화하는 제례의식이 치러지는 인간사였으면, 오, 제발!

 

‘쓰리 빌보드’

- 왜 광고판이 세 개일까?

억지스러울지라도 내가 이 영화 보기를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주제에 대한 답을 남긴다.

 

첫째 자기 자신을 향한 광고이지 않을까. 외출 시 차를 빌려달라는 딸에게 이를 거부하고는 노발대발하면서 집을 나서는 딸에게 한 말이 있다.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둘째 경찰을 포함한 공권력을 향한 것. 경찰서장 월러비와 망나니 같은 경찰 딕슨 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밀드레드는 월러비와 딕슨의 노력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가능하게 한, 이런 세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공권력의 노력 부족에 게으름과 이기주의를 함께 공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 강간범 등 파렴치한들을 향한 광고이리라.

“나는, 이 어미는 죽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두고 봐라. 네가 제대로 살 수 있을지. 설령 붙잡히지 않은 채 살게 되더라도 네 생은 내가 내린 저주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감독 마틴 맥도나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프란시스 맥도맨드, 우디 헤럴슨, 록 웰 등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일백 점에 가까웠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이도 저도 못한 채 버둥거려야 하는 인간사 저 깊은 곳을 파헤쳐서 진단하고자 하는 감독의 연출은 참 보기 드문 명작이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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