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 실화라니요, 그래서 다행입니다. 충분히 아름다운 견딤이자 삶이었습니다.
- 스포가 깊습니다. 원하시지 않으시면 여기에서 읽기를 멈추십시오. 영화를 꼭 보시고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 WHERE THE CRAWDADS SINGS>
드라마/ 미국. 125분. 2022. 11. 02. 개봉.
올리비아 뉴먼 감독
데이지 에드가 존스, 테일러 존 스미스, 해리스 딕킨슨 등 출연, 15세 관람가
- 사람들은 껍데기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분법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인간계의 암흑 세상을 뚫고, 자연의 품 그리고 참사랑으로 이겨낸 고즈넉한 사랑 이야기, 한 여자의 인생 성공기
'인생 성공기'라고 이름을 붙여 쓰고는 반성한다. 얼마나 어설픈, 자본주의적인 발상인가. 그럼 뭐라고 할까? 인생 고행을 꿋꿋하게 버틴 한 여자의 '품위'를 진정 높여야 하는데. '성공'이라는 낱말은 어울리지 않다. 성공은 지극히 날 선 칼날을 품고 있는 독한 글자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여주인공에게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낱말, 제법 모셔와서 내 글 속에 당당하게 세우곤 하는 '고아하다'를 삽입해서 표현해 보자. 그녀는 마침내 '고아한' 생을 살아낼 수 있었다. '고상하다'보다 조금 격이 높은 낱말이다. 높은 기상을 바탕으로 굳센 의지로 쌓아올린 우아한 힘에 의해 만들어진, 성스럽기까지 한 의미를 지닌 낱말이다. 고아하다(高雅하다).
'고아(高雅)하다'가 품고 있는 여러 가지 낱말을 데려왔다. 그녀의, 마침내 살아낸 성스러운 삶의 격을 더 높이기 위해서이다. 품격, 높다, 바르다, 꿋꿋하다, 당당하다, 우아하다, 심미안을 지니고 있으며 키워나간다. 굳세다, 기상, 의지, 뽐내다 등이다. 그야말로 그녀는 자기가 처한 상황의 우울을 견뎌내고 미적 함축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드높은 경지의 삶을 산다. 그녀에게 무한 존경을 표한다.
그녀. '습지 소녀'는, 부모로부터, 형제자매로부터 그리하여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평생 버림받은 채 살았던 그녀는, 그러나 자연이 펼쳐내는, 형형색색의 찬란한 생태계 안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보호하면서 키워나간다. 자연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높은 품격에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일체가 되게 한다.
바르고 올곧다. 어떤 무시와 업신여김과 깔봄에도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 흐트러짐이 없이 꿋꿋할 수 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끝에 집을 나간 어머니와 오라버니와 자매들로부터 소외되었지만 그녀는 자기 탄생의 근본이랄 수 있는 습지를 버리지 않는다. 마치 자연에의 배반은 생의 배반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여 그녀는 술 주정뱅이 아비 곁에 주저앉는다.
일어선다.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해 나간다. 집 앞바다에서 홍합을 파서 가게에 납품한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안쓰러움에 하나씩 구매 물품 사이로 끼워주는 구멍가게의 흑인 아줌마와 아저씨로부터 신뢰를 주고받게 되고 그들은 습지 소녀의 구세주가 되어준다. 그녀는 당당하게 일어선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지적 능력을 축적해 나가면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 숲, 습지의 대자연을 포용한다. 자연 속 사물들을 정성 들여 관찰하여 자연의 소리, 자연의 모습, 자연의 색깔, 자연의 심리를 듣고 보고 읽게 되니, 나아가 사랑으로 모아진다.
어릴 적 그녀를 습지, 술주정뱅이 폭력꾼인 아비 곁에 남게 한 데에 한몫을 차지한 소년이 있었다. 습지에 들어와 습지소녀에게 말을 걸어주고 관심을 표명하고 자기 존재와 소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지적이면서도 세상사를 차분히 받아들이고 자기 무늬로 엮어가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습지소녀가 당하는 온갖 구설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서 가까이 다가가 포근한 베풂을 나누고 싶었지만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세상의 눈이 무서웠다. 가여운 아버지의 소망을 산산이 부숴버릴 수가 없었다.
사랑은, 온전한 사랑은 그 어느 것도 사랑을 밟을 수 없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른 후 그녀를 찾은 소년은 그녀가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음을 확인한 후 문맹 탈피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영리한 그녀는, 자연에서 한껏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고 드넓은 자연 속에서 무한 상상력을 지니게 된 그녀는 금세 글을 읽고 쓰게 되며 정식 학교교육으로 지식을 습득한, 알량한 이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쓸 수 있다. 소년은 습지 소녀가 그동안 정성 들여 그려놓은 습지 생물들에 설명을 입히게 하고 그녀의 경제력을 키울 수 있는 백과사전식 책 발간의 길을 알려준다.
사랑은, 참 사랑은 절제가 가능하다. 순감을 잠재울 수 있다. 아름다운 영원, 숭고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잠시 미룰 수 있다. 소년은 대학으로 떠나면서 꼭 그녀를 찾아, 다시 돌아올 것을 맹세한다. 그녀에게 명시한 만남의 날을 기다리면서 소녀가 숨 쉴 수 있게 한다.
언니들의 옷장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드레스를 입고 바닷가 어느 곳에 나앉아 있는 습지 소녀에게 이 날은 소녀가 명시해 준 만남의 날이다. 한껏 부푼 가슴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소년은 오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지고 습지소년가 울부짖는 바다 저 반대편에서 춤추는 불꽃을 소녀 혼자서 바라본다.
자본이 야금야금 세상을 잡아먹기 시작한 구체적인 시기가 도래하였다. 1960년 대다. 미국은 충분히 그런 시기이다. 소녀의 집이 있는 습지를 측량하는 외지인들이 보인다. 구멍가게 흑인 아저씨의 말씀을 들어보니 습지에 있는 집은 소녀의 집이 확실하나 인증서를 마련해야 했다. 세무서를 갔겠지. 인증을 위해 거금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단다.
소년은 깊숙이 구겨 넣어둔, 소년이 책 발간에 필요한 출판사의 주소들을 적은 종이를 꺼내어 자기 그림과 글을 책으로 묶고 싶다는 우편물을 보낸다. 본격적인 '혼자 살기'를 시도하는 거다.
그 사이 소녀에게 또 한 사랑이 찾아든다. 말쑥한 차림새며 금수저를 확실히 드러낸 모습에 외면하였는데 어느 날 몸을 덮지는 사내가 '절제'를 보여줬다. 습지 소녀에게 첫사랑이 했던 '인내'를 참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발휘하겠노라고 한다. 소년 그만 외로움을 물리치기 위한, 이제는 영영 멀어진 첫사랑이라 여기고는 또 한 사랑에게 빠져들고 만다. 이미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참아낼 줄 아는 용기가 그녀를 마음 돌리게 했다.
지저분한 금수저였다. 세상 오물 속을 마치 자기 침실인 양 살아왔던 남자. 그는 순간의 섹스를 위해 습지소녀를 읍내 호텔로 유혹하여 '자기 절제'의 위선을 아우르고 그녀와의 몸 섞기를 재미 삼아 유포하는 날 건달이었다. 그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이때 첫사랑이 돌아온다. 습지소녀의 소문을 이미 접한 첫사랑은 날 건달의 실체를 확인하고서 습지 소녀를 찾는다. 통렬한 자기반성 하에 그녀는 절대로 날 건달에게 끌려다녀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그는 두 사람 사이 사랑의 매체였던 새의 깃털을 다시 건낸다.
그리고 남자가 죽었다. 자전거를 타고 습지를 달리던 어린 꼬마들에게 시체로 발견되었다. 날 건달이었다. 불행히도 그에게서 발견된 타살의 흔적은 붉은 털실이었다. 습기 소녀를 평생 조롱하고 짓밟아왔던 시민들이 배심원이 된다. 다행히도 자원한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그곳 토박이였으나 자본이 주무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잘 알고 있던 현인이었다. 차근차근 사건 발생일의 습지소녀 이동과정 증인들을 내세워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등 차분하게 배심원들의 마음 이동을 유도한다. 당신들에 의해 내쳐진 소녀를 아무 용의도 없는 상태에서 더는 짓밟으면 안 된다는 변론으로 습지소녀를 구한다.
재판에서 끝까지 증인석을 서지 않은 습지소녀. 그녀는 배심원들이 내린 판결은 자기 인생의 진행 방향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자기 생을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는다. 갯벌동물 백과사전도 발간하고 그녀는 첫사랑과 참사랑을 완성한다. 그곳 자기 집에서 습지 생물들의 생태계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면서 자기 생을 자기답게 일궈간다.
고아한 삶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발견하고 사고하고 추궁하고 각자 결론을 내리자. 일의 앞뒤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그녀답게 살아낸 것에 나는 큰 박수를 보낸다. 그녀를 끝까지 지켜낸 참사랑이자 첫사랑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리고, 그곳 그녀가 바다와 습지 생물들을 관찰하고 그리면서 보내온 세상을 나도 살고 싶었다. 부러웠다. 사랑이야, 뭐, 내가 무슨 그런 황홀함이 가능하겠는가 싶어 꿈도 꾸지 않지만, 그녀, 습지소녀의 예술혼 적인 삶은 꼭 나도 따라 해보고 싶다. 너무 늦었을까. 바닷가 땅, 몇 마지기 사놓은 곳에 농막이라도 지어 흉내를 내볼까. 혹시 아는가, 이제 평균 연령이 120살, 150살이라는데. 내 뼈는 아마 내 나이 뼈보다 대여섯 살은 젊으리라고 확신한다.
뻔한 결론이 예정된 영화였으나 영화 시청 시작 시각이 조금 전인 듯싶었다. 영화를 끝낸 시각은 새벽 세 시 삼십 분쯤이었다. 아름다운 나의 밤이었다. 이 영화를 소개해 준 어느 블로그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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