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영화

<희생> -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반응형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 안드레이 타르콥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 중에서

내가 그런다. 

 

 

- 위 문장은 영화평론가 김혜리의 책「묘사하는 마음」 서문 비슷한 글에서 가져왔다. 물론 나는 안드레이 타르콥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을 이미 읽었다. 다른 모든 내 배움의 흔적들처럼 단지, 내 뇌리에 위 문장이 뚜렷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다행히 위 문장이 풍기는 분위기를 여적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안드레이 타르콥프스키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노스탤지어>를 두어 번을 시청했다. 뚜렷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소 난해하나 내 영혼을 충분히 자극했던 영화라는 것은 확실하다.

 

영화 <희생>의 dvd도 구매하여 두 번, 아니 다섯 번 이상을 시청하였다. <희생>은 시청 후 며칠 동안 나를 매우 힘들게 했던 기억이 함께 있다. 장시간 상영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루함도 별 탈이 아니다. 다만. 엉뚱한 곳에서 불쑥 솟아나 나를 소용돌이 속으로 디립다 내꽂아버리던 기억들.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딱 '나'를 제대로 드러낸 낱말이다. '나'를 말한다. '나'를 본 적이 없는 안드레이 타르콥프스키이니 그는 이런 문장에 제대로 맞춤한 인간이 있을 것이라는 명석한 머리를 지니고 있는 셈.

 

혹은 그의 인생이 나와 같았으리라고 미루어 아름다이 상상에 머무르면서, 이 문장에 치중하기로 하자. 왜? 그의 영화 시청 결과, 그러한 난해함을 지닌 영화를 만들어낸 상상력은 내가 무척 갖고 싶어 하는, 심오한 인간 능력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영화 리뷰를 쓰다가 다 쓴 내 글을 읽은 후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아무리 무식이 용기라고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내 머리를 콱 눌렀다. 나는 일단 내 부모와 조상을 탓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여, 나는 내 생을 고작 정년이 보장된 이 미천한 전문직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의식이 내 뇌리에 형성되기 시작한 순간 이후 줄곧 '예술가'로 살고 싶었다. 

 

하여 나는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 읽고, 쓰고, 보고, 듣고, 만들고, 쓰고, 또 쓰고, 그리고 등으로 말이다. 이 지점, 이 시점에서 돌아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느 것'도 못 된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 어떤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해낸 적이 없다. 그 무슨 일도 일의 깊이를 끝까지 찾아 나선 적이 없다. 

 

다만 영화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줄곧, 단 한 장면도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봐 왔다. 다행이다. 그렇게 본 영화 중 <희생>의 기억을 되살려 리뷰를 간단하게 덧붙인다.

 

 

영화 '희생'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희생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

스웨덴 영화 15세 관람 가

 

엘란드 요셉손 - 알렉산더 역 : 늙은 문학비평가이며 저널리스트. 은퇴한 후 어린 아들과 시골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어 마음 편한 삶을 즐김.

수잔 플리트우드 - 아델라이드 역 : 알렉산더의 아내. 배우. 딸은 마르타. 알렉산더의 생일날 알렉산더에게 온다.

앨런 에드월 - 오토 역 : 알렉산더의 절친. 알렉산더가 사는 마을의 우체부

스벤 볼터 - 빅토르 역 : 알렉산더의 친구이면서 의사.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을 수술함.

구드런 지슬라도터 - 마리아 역 : 알렉산더네의 가정부. 알렉산더와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임. 동침해야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예언에 참여함.

발레리 메레스 - 줄리아 역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알렉산더. 그는 명성을 뒤로하고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산다. 실어증을 지닌 늦둥이 막내아들과 함께. 자기 생일날 아침 실어증의 아들 고센과 함께 산책 중 죽은 나무에 정성 들여 물을 주면 꽃을 피우게 된다는 전설을 들려주면서 함께 죽은 나무를 바닷가에 심는다.

 

그런데도 알렉산더의 생일에 세상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알렉산더는 가족과 이웃을 공포에 떨게 한다. 가족과 이웃,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신을 향해 기도한다.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 마을의 우체부인 오토가 찾아와 전한 구원의 비방이 있었으니. 알렉산더에게 자기 집 파출부인 마리아와 동침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비방을 알려준다. 알렉산더는 어느 이른 새벽녘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자기 늦둥이 아들의 실어증을 낫게 하고자, 마리아네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동침한다. 시원의 원시에 자기 몸을 맡긴 격이다. 원시적인 것을 진정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결과가 기대에 부응하면 어쨌든, 장땡이다. 하여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고 모든 문제가 제대로 사라진 것이 분명한 듯하고, 알렉산더는 신과의 약속을 떠올리면서 가족들이 외출하자 그 틈을 이용해 집에 불을 지른다.

 

 

영화 마지막의 집은 불타는 장면은 총 6분 52초. 지루하지 않은 롱 테이크로 유명하다. 이 부분의 영하촬영 비화가 유명하다. 영화 속에서는 그런데 이 장면을 찍다 카메라가 고장 나는 바람에 집을 새로 지어 다시 불태운 것이라니. 그리고 이 집은 타르콥스키 부부가 러시아에서 살던 집의 실제 이야기라니. 작가는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부르짖고 싶은 것일까.

 

영화 엔딩을 수놓은 마지막 삽입 음악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Erbarme Dich'(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이 영화 이후, 이 음악을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음악으로 나를 살게 하였다. 나에게 나를 잊지 않게 하고자 발버둥을 쳤다. 이후 아마 이 음악으로 내리 5년은 거뜬히 살았을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