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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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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드라마

이란, 프랑스

118중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바흐만 고바디 등 출연

 

 

 

테헤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산골 마을 시어 다레(검은 계곡)에 지프차에 탄 세 사람이 출몰한다. 그들은 왜 왔을까. 그중 두 사람은 첫 장면에서만 몸을 보일 뿐 이후 끝까지 목소리만 몇 줄 필름에 나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남은 한 사람, 안경을 끼고 산골 마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장이다. 지적으로 열렸을 법한 이 남자가 소지한 물건은 카메라뿐이다. 그가 한 행동도 특별히 없다. 카메라로 몇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그는 줄곧 이 산골 마을에서 며칠 공짜 생을 산다. 

 

 

그는 신문 기자이다. 이 산골 마을의 장례 풍습을 기사로 쓰기 위해 왔다. 장례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 더 좋아지기까지 한다. 함께 온 사람들은 장례 일정을 맞추지 못한 것에 남자 주인공을 구박한다. 동료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마을을 어서 떠나지 않는 것은 뭘까. 그가 만난 인물들을 통하여 묘사해 본다. 

 

 

이곳에 왔던 첫날 만난 소년 자하드이다. 소년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극히 사람다운 사람이다. 어린이인데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글쎄다. 주위 어린이들을 돌아보라. 소년은 단 한 점의 욕심 없이 친구가 되어준다. 자기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준다. 죽으리라 여겼던 노인은 죽지 않고 동료들로부터 구박을 당하고 있는 주인공이 그들에게 진실을 전해주어 문제가 발생했다고 여겨 소년에게 진실을 숨길 것을 명령한 다음에야 사람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거리를 둔다. 그때서야 주인공은 소년에게 사죄한다. 물론 아직 진심 어린 사죄라고 여기지 못했거나 뜻밖에 당한 상황에 진저리를 치게 되었거나 간에 소년은 주인공의 도움을 거부한다.

 

 

주인공은 소년으로부터 사람이라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았다. 의식주, 모든 상황을 주인공은 소년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소년으로부터 진실된 상황을 전해받은 동료들로부터 반격을 받자 즉각 소년에게 전화를 돌려 진실을 말한 것을 대해 나무라는 행위는 진정 참 지식인이라면 하지 않았어야 했다. 빵을 가져다주고 우유를 공짜로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자기가 직접 캐내야 할 정보를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해 주는 이에게 그런 식으로 대한 것은 인간이 쓰고 있는 위선의 지저분한 진면목이다. 소년에 대한 자기 행위를 곧 반성하고 사과하기 위해 학교로 달려간 것 마저 하지 않았다면 그는 더러운 인간이다. 기자라니. 하긴 요즘에도 기레기성 기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동의 참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이 꼭꼭 숨어있는 산골 마을, 마을 사람들은 몸을 제대로 움직일 만한 성인이라면 모두 일을 한다. 몸을 움직인다. 유유자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노동으로 먹고 자고 배설하고 섹스를 하고 꿈을 꾼다. 카페를 운영하는 한 중년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기자 자신도 함부로 내팽개친 카메라를 보관해 둔다. 차를 대접하자 여자로부터 차 대접받는 것이 처음이라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당신은 어머니로부터 차 대접을 받은 적이 없냐고. 바로 어머니의 노동이었다고. 여자는 세 가지의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아침 준비와 낮 동안의 노동과 남편의 섹스 도우미가 되는 저녁일까지. 함께 있게 된 마을 어른이 대꾸한다.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더군다나 저녁 일은 번식을 위한 큰 일이라고. 여자가 그에 대꾸한다. 나를 위한 일은 누가 해주느냐고. 주인공의 고민이 추가된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민과 '일'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 

 

 

공짜 우유를 제공해 주는 한 소녀를 만난다. 지하 동굴에서 젖을 짜는 소녀. 소녀는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 얼굴도 들지 않는다. 5년을 공부했다고 한다. 소녀에게 시를 읽어준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시인의 시. 포루그 파로흐자드. 그녀는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다. 그녀는 인습 타파를 담은 글과 영상으로 힘든 삶을 산 듯싶다. 사고로 사망했다니 그 자세한 내막도 궁금하다. 시는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소녀가 시를 듣고 주인공에게 묻는다.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공부 5년으로도 충분하단다. 어둠 속에서 지나치게 인색한 전기를 기대할 것도 없이 소녀가 시를 썼으면 좋겠다.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아름다운 시를 써서 태양에게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포루그 파로흐자드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이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는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으로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1935 ~ 1967)

 

 

무덤을 파던 한 남자가 있다. 주인공이 전화를 받기 위해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만나게 된다. 그는 혼자서 노동을 한다. 홀로 하는 노동이 마음 편하다고 한다. 혼자서는 노래도 부르면서 즐겁게 일한다. 그런 그의 매몰 사고를 주인공이 접한다. 마을을 돌면서 노동을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의사까지 와서 남자는 아마 살게 될 것이다.

 

 

무덤 파는 남자가 주인공에게 왜 이곳에 왔는지를 확인한다. 주인공은 보물을 찾으러 왔냐는 남자의 말을 얼버무린다. 무덤에서 파낸 뼈를 달라고 해서 차에 싣는다. 뼈를 차에 싣는다. 마지막에 떠나면서야 뼈를 물에 버린다. 어서 죽게 해 달라는 기도였을까. 혹은 왜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자기 번민이었을까. 

 

 

늙은 의사는 문명을 사는 것일까. 비문명에 묻혀 사는 것일까.

 

 

무덤 파는 남자의 사고로 인해 늙은 의사를 만난다. 죽어간다고 여겼던, 이제는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다는, 마을 노인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의사를 꼬드긴다. 의사는 말한다. 곧 죽을 것이라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의사가 답한다. 일은 많지 않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저편 죽음이 아니어서 충분히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대자연을 즐기면서. 주인공은 또 고민에 빠지지 않을까. 살고 있는 이승의 즐거움 대신에 왜 죽음의식을 찍으려고 하는가. 굳이 큰 손님이라도 된 듯 마을 사람들에게 얹혀 있으면서 어쩌자고 죽음의 장면을 찍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가. 

 

 

주인공. 그가 마을에 들어와서 한 일은 제대로 터진 전화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높은 곳을 차를 끌고 오르는 일이었다. 통화를 하고 소년을 조정하여 죽어가는 노인의 정보를 받고 마을 사람들을 몇 번 차에 태워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일이었다. 그가 한 노동은 엄마를 애타게 부르면서 울부짖는 갓난아이를 어르는 일과 어둠 속 나의 미래 여류 시인에게 시를 읽어주는 일과 소녀의 어미에게 우윳값을 지불하려고 애쓰는 일과 무덤 파는 남자의 위험 상황을 알리는 일과 의사를 죽음 앞 노인에게 안내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긴 시간 공력을 들여서 한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카메라 앵글 바로 앞에서 한 듯한 행위이다. 면도하기. 감독은 왜 이 장면은 롱타임으로 이끌었을까. '고작'이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싶다. 그가 하는 일은 놀고먹는 상 손님 대접을 받으면서 오직 자기 얼굴 다듬기에 세월을 소일한 것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내 사는 곳 어디 혹 천국이지 않을까.

 

놀고먹는 이들이여, 각성하라. 바람도 노동을 하는 자를 이끈다. 너, 걸신들린 듯 돈에 찌든 자들에게는 불지 않을 것이다. 부디 노동을 하면서 살아라. 노동한 대가로 얻어낸 물질만을 네 입에 넣으라. 타인의 노동을 '감사한다'는 말 한마디로 취하려 들지 말라. 바람이 너를 데려다주게 하려거든 일을 하라. 부디 몸을 움직이라. 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는 기쁨을 맛보라. 그런 자만이 자연을 즐기고 자연 속에서 숨 쉴 줄 알고 타인을 존중하고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 명심하라. 그러므로 주인공이여, 너는 딱 한 가지, 어둠 속 소녀의 정신을 눈 뜨게 한 시 낭송만이 깊은 시골에 와서 해낸 사람다운 노동이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는 완전한 내 취향이다. '사랑을 카피하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올리브 나무 사이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내가 이미 본 그의 영화이다. 물론 오래전에 본 영화들이어서 아마 반을 더 봐야 처음 영화를 볼 때 느꼈던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다시 보고 싶다. 

 

 

5년 공부만으로도 시인이 될 수 있다. 나도 시인이고 싶다. 이미 포기했지만 가끔 나를 들썩이는 주제이다. 그리고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를 만난 것은 이 영화를 본 나의 가장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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