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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5 TO 7> - 절망적일 때에는 글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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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O 7

2015년 개봉

미국 15세 관람 가

빅터 레빈 감독 

안톤 옐친, 베레니스 말로에. 글렌 클로즈 등 출연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I remember you everyday. 이곳 블로그를 열기 전까지의 제목은 위 문장이었다. '나는 매일 당신을 기억할 거다.'

 

 

현재 내 상황과 심사에 맞추어 택하고 싶었다. 다음 문장을 택했다. You have to write when you are desperate. 절망적일 때에는 글을 써야 한다. 영화 시나리오와 똑같은 문장인지는 모르겠다. 영문으로 옮겨놓고 보니 간절함이 덜 하다. 

 

 

그리운 안톤 옐친 - 스크린숏으로 가져옴

 

 

작가 지망생. 보내는 족족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고 있는 청춘 사나이(안톤 옐친 분)는 실패의 흔적을 거실 벽에 쭈욱 붙여놓고서 글을 쓰고 있다. 여자에는 통 관심 없음. 그저 혼자 읽고 쓰고, 혼자 말하고, 그리하여 정신질환자로 의심받을 것이라 자가 진단을 하는 사나이. 부모는 법조인을, 법조인 자식을 꿈꾼다. 로스쿨 진학을 강요하는 상태이다. 뉴요커. 그, 브라이언이 말한다. 뉴욕에서는 만나려고 들면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어느 호텔 앞을 지나다가 흡연 중이던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 옆에 담뱃불을 붙이면서 브라이언이 선다. 온몸에 인텔리 적인 풍을 지니고 있는 여자다. 살 만큼 사는 여자이다.(이는 어느 누가 봐도 당연히) 이 모든 것을 떠나 사내 브라이언은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다. 사랑은 쌍방이 한 곳을 바라볼 때 진행되는 것. 그녀도 그의 곁에서 흡연하고 있는 사내에게 반한다. 한 여자의 눈에서 시작된 빛이 한 남자가 내뿜은 빛에 가 닿는다. 

"흡연자들은 추방당한 것 같아요."

흡연자들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만남이 시작된다. 그래, 담배 연기야말로 자기 생각을 정화해 줄 수 있는 대단한 음식물이라고 외치는 이를 한때 본 적이 있다. 꽉 막혀 있던 것들이 담배 연기와 함께 술술 풀린다고.

 

 

한눈에 알아본 참사랑이여. - 스크린숏으로 가져옴

 

 

계약 연예를 진행한다. '진행한다.' 이 낱말을 발음할 때면 가슴이 욱신거리곤 한다. 나는 뭘 받으려고 해야 하고 대신 나는 뭘 줘야 하지? '계약'이라는 낱말은 솔직히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참 언짢은 내용을 담고 있는 언어이다. 지저분할 정도의 격식과 통제를 지켜내기 위한 저 윗사람들이 만들어낸 낱말이다. 여기 이 영화에 이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계약 연예'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브라이언과는 상관없이. 

 

 

'계약'이라는 낱말을 광의로 해석해보자. 자본주의가 내세운 대표적인, 아주 강한 마약 성분의 특이함을 함유하고 있다. 당사자가 있고 상대방이 있다. 둘이 정을 통하는 데에 사전 계약이 있다? 단언하건대 이것은 일종의 신분제도이다. 조선 시대의 신분을 넘어선다. 경제제도가 포함된 일종의 노예 계약에 다름없다. 구시대에는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였던 미개 시대의 산물이었다. 크게 느끼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보니 그렇고 그런 사람살이로 지냈을 것이다. 점지된 운명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편한가. 모르니까 그것으로 됐다. 그 옛날에는 말이다. 현재의 '계약'은 그것과는 판이하다.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전초전으로 둔 문서화나 구두의 실랑이는 계약으로 사람을 끔찍하게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당하게 사람을 밟을 수 있는 완전 개방형의 신분제도이다.

 

 

그냥 부부

 

 

A가 있다. B가 있다. 본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데려와서 적용해 보자. A와 B는 계약서가 있는 부부이다. 둘 곁의, 서로가 인정하는 서로의 정부 C와 D는 A와 B가 잠시 그 위치를 허락한 부산물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 왜? A와 B의 계약서 아래 존재하는 생물체이기 때문이다. C와 D는 인정했던 기간에 대한 일급을 받을 수 있다. 기대하라. 그곳에 정이 있겠는가, 사랑이 있겠는가.

 

 

A라는 남자의 여자를 C라 하자. A의 문서 상 여자인 B의 곁에 자리한 남자를 D라 하자. 본 영화의 줄거리가 그렇다. 부부가 서로의 정부를 인정하는 시스템 아래 사랑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불륜도 아니네? 그렇다. 이미 A와 B의 서약서에 부차적으로 입적된 사랑놀음에 불과하다.

 

 

A가 D를 가족 모임에 초대하여 말한다. 

"당신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소. (가능한 한 즐기시오.) 다만 우리 부부의 서약서를 바탕으로 한 일원이오. 기억하시오, 명심하시오."

가족 모임에는 A의 정부, B가 기꺼이 인정하는(서약서상 기준으로) C도 와 있었다. A는 C를 D에게 소개하면서 문서상 역시 한 가족임을, 이를 충분히 축약시킨 문장을 구사한다. B는 심지어 자기 두 아이를 D에게 맡기기까지 한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겠는가?'의 물음에 가끔 돌출되는 꿈이 자라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흡연 중이면서 청년이자 작가 도전 중인 C이다. 그는 사랑을 하고 만다. B가 그런 여자다. 충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자이다. 무엇보다 D는 B와 A의 문서상 부부관계를 확인한다. 돌출 중이던 꿈이 나래를 활짝 편다. 스토리 전개 상 틀림없이 그래야 할, D가 작가 도전에 성공한다. D는 용기백배한다. 젊으니까. 젊으니까? 젊지 않아도 부릴 수 있는 객기이다. 왜? 사랑을 하니까. 참사랑을 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B에게서도 이를 매번 확인한다.

 

 

만남의 시간이 정해진 만남이라니 - 영화 홈에서 가져옴

 

 

D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B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B의 연예 가능 시간이 정해져 있다. 두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5시에서 7시까지. A와 문서상 결혼 정도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A의 곁에 B가 머무는 것은 두 아이 때문이다. 결혼 반지를 사 들고 청혼을 하는 D에게 B가말한다. 남편과의 삶이 문서 상 결혼에 불과하며 당신과의 사랑이 참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내게는 나를 버리면 마침내 함께 버려지고 말 두 아이가 있다. 

 

 

꿈 속에서나 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공식적인, 상식적인, 조직과 사회와 그리고 나와 너, 우리가 얍삽한 마음 씀씀이로 정해놓은 규율이 옭아맨 것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살고 싶다는 생각. 모든 사람이 갈망할 거다. '진보'라는 말을 앞세워 사랑도 진보해왔다. 단지 영화 속에서 들먹여지는 것처럼 프랑스 사람만이 그럴까. 그저 프랑스 특유의 문화일까. 아하, 더 나아가지는 말고. 딱 거기(?)에서 멈추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유, 자유로운 사랑!

 

 

B도 그랬다. 사랑이라고 여겨서 A와 결혼했다고. 한데, 살아보니 아니더란다. 난망하다. 사실 해결 방법이 없다. 무망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만, 멈춤을 해 보자. 사람은 다르다.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을 하지 말자고 외친다. 그렇담 '나' 안의 '나'는? 늘 '나'인가? 오늘 조금 전에 시청한 '알쓸인잡'에서도 그러더라. '나'라는 존재도 알 수 없다고. 나,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렇더라. '나'를 알 수 없어. 시시각각 달라지는 '나'로 인해 '나'는 얼마나 성가시고 가슴 쓰라린지 몰라. '나'를 견뎌내느라고. 아, 이를 어찌 해석함. 

 

 

왜 이렇게 진지하냐고? 인간사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브라이언과 아리엘의 사랑을 그저 '불륜'이라고 몰아붙이면 아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다는 거다. 

 

나도 영화관에서 팝콘은 먹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리엘도 그런다. 미국 사람들은 왜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냐고. 나도 외치고 싶다. 제발 팝콘은 영화가 끝나면 먹어! - 영화 홈에서 가져옴

 

 

B가 말한다.

"세상에는 싸울 힘이 없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 그리고 사랑."

"D, 당신의 청혼 반지를 접수하겠다. 내일 떠나자."

그러나 B가 덧붙인다. 

"남편과의 대화가 오갈 것이다."

왜? '계약'되어 있으니까. 부부관계가 문서적으로 옥죄고 있으니까.

 

 

인어공주. 참 B의 이름이 아리엘이었다. 인어공주의 이름 아리엘. 그 아리엘의 남편이 사랑 여행을 준비하는 D의 새날 아침을 찾는다. 예상한 대로이다. 현관에 선 남자는 브라이언의 뺨을 후려갈긴다. 

"당신을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소? 이를 위반하다니."

흑색 화면에서 흑색 의상으로 흑색 표정과 일급으로 계산한 봉투를 남기고 A는 떠난다. 

 

 

 

 

C가 D에게 와서 말한다.

"당신이 없는 B를 보니 죄의식이 느껴져서 A 곁을 떠나왔소."

 

 

D가 말한다.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거다.

"고통도 때로 필요하다. 고통은 글을 쓸 때 해소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 나는 매일 당신을 떠올리오."

 

 

D의 소설 <인어공주>가 서점에 비치된다. 2년(3년? 아니다. 어쨌든 몇 년)이 지났다. 우연히 만난 B와 D의 가족. A는 D에게, C의 소식을 묻는다, 당당하다. A는 D의 아내가 아기에게 무의미한 말을 쓸데없이 내놓는다. B와 D의 소통을 돕는다. B는 청혼 용으로 줬던 반지로 D의 안에 자기 존재를 확실히 들어 앉힌다. 그래,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 속에 끼어있던 반지를 D는, 그대로 B에게 돌려줬더랬다. 뉴욕이 뉴욕다웠다.

 

 

- 황망한 죽음의 소식으로 나를 안타깝게 했던 '안톤 옐친'을 그리면서. 두 번 본 영화의 리뷰를 작성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영화 시청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안톤 옐친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서 새삼,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사이사이 비춰주는, 뉴욕주 센트럴파크 공원 묘비(아니면 벤치?)에 새겨진 문구들이 매번 강하게 내 가슴을 쳤다. 나는 어떤 문장으로 기록될까. 그중 한 문장을 소개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I will hold your heart more tenderly than my own."

당신의 마음을 내 마음보다 소중히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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