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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쥬드 - 그래요. 이 세상 오직 단 하나의 부부는 당신 '쥬드'와 '수'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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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드. 그래요. 이 세상 오직 단 하나의 부부는 '쥬드' 당신과 '수'뿐이오.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결.

자연 위에 합리를 접목한, 사람의 힘이 더해진, 들판의 결이 펼쳐진다. 무채색의 음울한 물결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는 끝까지 음산함을 버리지 못한다. 무채색이래야 흑과 백 그리고 회색의 조합이어야 하는데 가끔 전개되는 유채색 모음도 따뜻한 무늬를 만들지 못한다.유채색마저 무채색이 된다.

 

 

결은 곧고 바른 성미의 상징이 아일까. 자기 앞의 생을, 기꺼이 펼쳐내고야 말겠다는 기개의 표현일 것이다.  그 결은 무궁무진 펼쳐질, 꿈의 바닥을 다져가는, 틀에 묶인 자기 생을 용납하지 않은, 인간계 무지의 구성원들이 만든 섬뜩한 규격을 무너뜨리고야 말겠다는, 도사려서 그 규격에 깨질 틈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현세 인간들의 알량한 틀을 무너뜨리려는, '사이', '때', '짬'의 겨를이 아니었을까.

 

 

비 그리고 눈.

화면은 끝없이 하늘이 주는 물질을 두 손 가득 받아내야만 한다. 비와 눈마저 사람의 일상을 따뜻하게 적셔주질 못한다. 음침한 하늘을 만들고 고픈 배 속 남은 영양분마저 지와 눈을 함께 쓸려가게 한다. 더욱 주리게 한다. 서로 쓰다듬고 나누어야 할 가슴이 내쉬는, 호흡마저 젖어들게 하고 만다. 그들의 생에 건강한 태양빛을 받아마실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었을까. 신은 너무 궁했다. 신, 자기 자신의 이율배반이다. 

 

 

원을 뚫어 나아가기.

이미 그려진 동그라미 안에서 원을 그려가는 삶이 차라리 나았을까. 살아가는 나날, 생이 지녀야 할, 참 가치를 심어주는 이와 닿은 인연이 그릇된 것이었을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큰 눈을 키우려는 삶이 그만 가지 말아야 할 길이었을까. 우연은 인연이 되고 확장된 세상을 꿈꾸는 큰 눈에게 순간의 접신에 기대한 이 있어 돌아서게 되는데. 학문 추구의 삶을 추구하는 이에게 양돈집 처자의 유혹이 덤빈다. 혼인이라는 성사를 치르는 데에는 처자의 거짓이 작용하였다. 임신.

 

 

리본을 만들 수 없는 끈.

닿지 않았어야 할 끈이었다. 벽을 세우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는 만남이었다. 혼전임신은 거짓이었고 한 이불속 서로 다른 꿈. 육신과 육신의 합 만으로는 결코 나란히 앞을 내다보고 걸을 수 없었다. 각자 박차고 나아간다. 거슬리는 꿈은 어서 깨뜨려야 한다. 그러나 근본을 자르지 못한 인연이 결국 사람을 붙잡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뛰어넘기.

도약하는 곳, 꿈꾸는 세상을 갖게 한 이가 있었다. 저 멀리 가기 위해 공부하라. 동안 쌓고 단단하게 여민 꿈의 터를 향해 달려간다. 이미 다 자란 큰 눈을 가볍게 안아 보듬고 길을 나선다. 그에게 꿈을 심어준 이와의 만남만 성사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운명이다 싶었으나 동행해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났다.

 

 

혈연. 금기의 사랑.

정해진 운명을 붙잡고 통곡한들 방법이 없는 내력. 첫 만남에 눈을 사로잡은 여자는 사촌 간이었다. 모진 시련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운명. 그것이 곧 '타고난다'는 것이었네. 거칠 것 없이 다부지게, 그대와 함께, 내가 준비한 내 안의 것들을 나누려고 하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이었네.

 

 

돌아서면 잊히기를.

거부의 몸짓으로도 천기를 거스를 수 없는, 끝맺음이 불가능한 천명이더라. 또 다른 운명이 이미 부여된 것. 벽을 치고 나아가려니, 그저 소망하면 안을 수 있으리라 여기노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기꺼이 수용하려니. 헤쳐 나아가리니. 두 손 꼭 잡고 함께 건너는 강, 언젠가는 우리 앞에 징검다리 놓이려니. 보살펴주는 이 우리 앞에 서 있는 꿈을, 우리들의 기도로 이룰 수 있으려니. 높고 높은 둘레이나 한낱 울타리이거니, 우리들의 고귀한 마음 기꺼이 안아주리라. 신이 있지 않은가. 주여.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깊이를 심는 생은 당연히 무겁다.

그 무거움을 부드럽게 끌어안아주는 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곱씹어 마침내 이룬 사랑을 내리쳤다. '무리'라는 것에 기대어 사는 보통 사람들이 더 무섭다. 만만한 데 말뚝 박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 천둥도 찌를 듯 모인 모기들의 힘을 부리는 그들은 두꺼비의 힘을 쫓은 파리들이었다. 현세의 흐름을 뚫고 나가려던 운명은 

파리와 모기들의 힘 앞에 그만 무너져내리는 것일까. 어떻게 될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끝에 우리들을 함께 엮어줄 굵고 건강한 힘 있 내려주소서. 어느 날 문득, 눈 뜬 세상이 우리를 위한 길을 곧게 만들고 있었으니. 그 길 함께 걸을 수 있으려니. 그래, 이제는 하하 호호. 옷도 사고 집도 사고  꿈도 사려니.

 

 

모든 것은 꿈이었다. '결'은, 결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머물러 있는, 펼쳐짐에 그치고. 벽은 너무나 두껍고 두텁고 징그럽게도 튼튼해서, 통곡의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었으니. 

 

 

"우리는 너무 많아요."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너무 많은 무리에 속하는 두 동생들도 함께 데리고 간 오빠가 공중에서 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셋은 장례를 선도하는 젊은 신부의 외침 속에 땅에 묻힌다.

"우리는 이 세상과 천사들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우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며 알몸으로 싸웁니다. 또한 머물 것이 없어 떠돕니다. 우리는 은총을 주고 박해 속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고통 속에 탄원합니다. 우리는 이날까지 세상의 오물이며 쓰레기입니다."

 

 

고통 속에 탄원합니다. 우리는 이날까지 세상의 오물이며 쓰레기입니다.

 

 

태생이 태생을 낳았습니다.

 

 

신이시여! 나는 어느 종교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어느 종교의 기도에도 부응하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외치노니, 부디 신이시여, 당신이 존재한다면 '심판'이라는 것 좀 적당히 하소서. 가려가면서 하소서. 심판을 받아야 할 인간들을 심판하소서, 오, 제발!'

 

 

원 제목은 '비운의 쥬드'였단다. 

 


케이트 윈슬렛이여! 영화 '타이타닉'에서 나 외쳤네. 왜 저리도 뚱뚱한 여자가 나의 남자 친구 디카프리오(나는 디카프리오를 '길버트 그레이프'에서부터 만났으니)의 애인이냐고. 한탄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하노니, 용서하시라. 당신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부터 나를 사로잡고 말았소. 디카프리오와 다시 만난 '레볼루셔노리 로드'에서부터는 결코 디카프리오 옆의 당신을 질투하지 않게 되었음도 고백하노니. 이 영화 '쥬드'에서의 당신과 크리스토퍼 에클리스턴, 그리고 리암 커닝햄의 연기를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소. 세 아이들의 영전에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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