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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성룡의 홍번구 - 성룡의 무술로 가벼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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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의 무술로 가벼워지다.

- 지난주 토요일에 봤던 영화 <홍번구>의 리뷰이다.

 

 

 

 

저 지붕 꼭대기에서 성룡이 폼생폼사 취권을 흔들면서 날아다닐 듯하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오랜만이다. 그야말로 뜻밖에 찾은 즐거움이다. 영화 '풀타임'을 봤다(이 영화 리뷰는 다음에 올리기로). 먹먹해서 TV 채널을 무의식적으로 돌리는데 마침 EBS에서 '주말의 명화' 시작 시각이다. '홍번구'만 읽었다. 메가 TV를 재빨리 검색했더니 평점은 5점 만점에 4점을 넘은 점수다. 돈을 지불해야 볼 수 있다. 1520원이던가. 재빨리 EBS로 돌아와서 영화 이어 보기를 하기로 결정지었다. 

 

 

오호, 성룡이었다. 그저 액션이려니 하면서도 평점에 그만 마음이 녹았다. 보기로 했다. 미국 삼촌네로 건너간 성룡이 성룡스러운 주 무기를 들고 미국에 섰다. 삼촌은 돈 좀 벌었다. 아름다운 사랑과 결혼하는 삼촌 곁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는데 삼촌의 마을은 그야말로 불야성 같은 소도시인 듯.(도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거리를 지배한 날건달들, 성룡은 정의와 싸우잖아. 가만있지 않지. 그런 성룡을 터줏대감 지역 난봉꾼들은 절대로 텃새를 감추지 못한다. 어기적거리는 정도에서 소도시를 지배한다고 여기는 인간들을 정의의 사자는 두고 보질 못한다. 당연하다, 왜? 성룡이니까. 한 대 야무지게 쥐어박아준다. 악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자이다. 

 

 

기가 막히다. 다만 취권을 부리는 성룡은 아니다. 물론 취권을 완전히 벗어난 무술도 아니다. 성룡의 액션이 자잘 자잘하게 내 몸뚱이며 내 영혼에 붙어있는 기생충들이며 거머리들을 쏴아 떼어낸다. 심지어 내 혈연인 듯 느껴진다(조금 지나쳤나?). 나를 달래고자 내 앞의 스크린 속에 성룡이 자기만의 액션을 구획하여 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를 위로하고자 부리는 개구질이라 여겨질 정도로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내가 즐기는 성룡은 영화 속에서 마냥 영웅으로 세워진다. 

 

 

다시 성룡이 나오는 세상이 존재할까? 다시 성룡의 취권을 능가한, 마냥 재미있는 무술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최고의 무술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지저분한(?) 인생인들 어떠하랴. 그의 최근 친 중국 전향 등도 문제가 되고 있다. 다만 무술영화의 주인공 성룡으로 보자면 그는 그저 만만한 사내가 아니다. 어린 시절 목숨을 담보로 무술 수업을 받았기에 그런 일탈이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리라. 일찍이 그의 무술에 마음이 쏙 가던 시절은 안녕을 고했지만 새삼 성룡이 영웅화된, 가볍게 한 사회를 무술로 쓰다듬어버리는 기세는 친근하고 재미있다.

 

 

영화  끝, 엔딩에서 보여주는 촬영 장면들이 진짜 참 멋이다. 그곳에 성룡의 참모습이 존재한다. 성룡이 없었으면 이런 즐거움, 이런 상쾌함, 이렇듯 속 후련해지는 통쾌함을 가볍게 얻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보여줄 수 있었겠는가. 성룡은 참 고마운 존재이다. 쌓이고 쌓인 피곤함과 도무지 정리되지 않은, 어떤 알 수 없는 혼돈으로 머리 쥐 뜯고 싶을 때 무거운 짐 거뜬하게 패대기를 칠 수 있는 영화여서 성룡 영화를 여전히 보곤 한다. 아주 가끔씩이지만. 

 

 

성룡, 그는 결코 나를 아래에 놓은 입장에서 통쾌함을 선사하려는 계획은 없다. 그게 좋다. 흔히 희극은 그렇다고 하지 않은가. 자기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내리는 선물. 희극이라지 않는가. 그렇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저것 상관없이 머리 가벼워지면 좋잖은가.  

 

 

그러므로 나는 성룡 덕후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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