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영화

영화 <아이, 애나> -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반응형

 

 

 

 

 

아이, 애나 - 다시 행복해질 수 있기를!

 

 

 

영화 <아이, 애나> 포스터 -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하얀색 격자창이었다. 그녀가 자기 흔적의 터에 입실한 곳은 사방이 흰색이었다. 단 몇 분, 그녀는 출입문을 꼭 잠그고 그 터와 관계된 자기 행동의 며칠 궤적을 떠올린다. 거대한 도시 뷰가 가능한 베란다를 나선다. 외부와의 소통이 가능한 유리창을 넘어선다. 우주로 뻗쳐있는, 실외로 뾰족 얼굴을 내민 창턱 좁은 공간에 몸을 세운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십구 층이었던가.

 

 

 

 

두 싱글 남녀가 마주친다. 싱글남 '버니'는 형사이다. 런던 고층 아파트에서 백인 남자 조지 스톤(랠리 브라운 분)이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버니는 사건 현장에 달려와 있다. 마침 그의 곁으로 고상한 몸짓의 한 여인이 지독하게 단정한 용모에 단아한 걸음을 더하여 지나간다. 같은 층에 어떤 볼 일이 있어서 완전하게 일을 보고 퇴장하는 듯싶다. 그윽한 품새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한 여자. 그녀는 '애나'이다. 

 

 

 

 

그녀의 이름은 애나였다. 이혼녀. 그리하여 영화 제목은 <아이, 애나>이다. 싱글 중년을 사는 그녀. 대형 침구 가게에 근무한다. 침구 가게는 소비자가 쌍으로 드나든다. 침구 위에서 반은 적나라하게 행위예술을 펼치는 소비자의 합동 행위 위로 그녀, 싱글 중년 여자의 공허가 뒤덮인다. 그녀에게는 전남편과의 사이에 결혼하여 혼자된(?) 딸이 있고 딸은 또 딸이 있다. 손녀는 근래 몇 걸음, 걸음마를 배우는 단계이다. 아마 그녀와 동거 중이었던 듯싶다. 딸은 늘 제 아비의 존재를 들먹인다. 

 

 

어울리는 한 쌍. 버니는 그녀가 사랑이었을까&nbsp; -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이혼남 버니. 그는 형사이다. 그의 곁을 지나간 한 중년 여자에게서 강인함을 해체하는 빈틈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일종의 동료 의식이었을까. 혼자 사는 여자의 냄새가 느껴졌을까. 도도한 걸음걸음에서 어딘지 모르게 숨겨져 있는 듯한 쓸쓸함을 눈치챘을까. 사람은 사람을 알아본다. 나와 어떻게든 연결될 사람이라면 킁킁, 그녀 혹은 그가 읊조리는 마음 가락을 몸 냄새로 알아낸다. 인지상정이더라? 살아보니?

 

 

 

 

무슨 이름이었던가. 주최 측에서 부여하는 이름으로 참가하는 싱글들의 파티가 있다. 하룻밤 사랑도 괜찮을 듯한 모임. 혹은 건강한 이성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녀 애나는 다른 이름으로 한 남자를 만난다. 불행히도 남자는 마약중독자. 한껏 부푼 꿈의 싱글 파티가 마약으로 뒤틀린다. 플라톤식 사랑놀이의 고상함을 기대했던 그녀 애나에게 변태 성욕이 주문된다. 그녀는 이성을 잃는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 이상을 요구했다고 했다. 형사 버니는 그날, 첫 만남에서의 그녀의 모든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녀가 공중전화를 찾아 누구에겐가 전화를 거는 모습. 그곳에 남겨진 우산과 신문(?). 차로 걸어가면서 도로 바닥 타일에 걸려서 주춤거리던 구두의 굽. 그도 싱글 파티에 참가한다. 애나를 만난다. 의도적이다. 그러나 형사이자 남자이다. 두 갈래의 길에서 그는 혼돈 상황이다. 애나는 버니에게 용의자이자 팜므 파탈이었다. 치명적인 여자. 어쩌면 요부라고 해도 되겠다. 조심스레 고정시킨다. 파탈! 그녀는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녀의 이혼 사유였다. 

 

 

왜 불행은 계속 될까. -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하얀색은 붉은 피의 뒷배경으로 어울린다. 마약으로 사는 남자, 변태 성욕자, 성폭력. 그, 조지 스톤은 그녀에게 그 이상을 요구한다. 버니와의 첫 만남의 날 그녀가 고백한다.

"나는 이혼녀이다. 그는, 남편은 내게 그 이상을 요구했다. 나는 아이 낳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좋아하지만 기르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어딘가에 아이를 버리고 오기도 했다. 그냥,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치명적이 여자였다. 애나! -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곳에 옮기는 위 몇 문장으로 영화 속에서 외치는 그녀, 애나의 심정을 모두 표현하지 못했다. 예상하건대 분명, 남편도 그런 삶을 살기로 하고 혼인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그녀의 목소리에서 확인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느꼈다. 분명하다.

 

 

 

 

 

첫 싱글 파티에서 만났더라며! - 다음 영화에서 가져옴

 

 

소화기로문을 열어 버니가 살인 현장으로 들어선다. 자살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드높은 무대 위에 선 그녀를 붙잡는다. 그녀는 그를 만났다. 가슴 한편에 그날을 묻고서 그를 만난다. 버니이 품에 안겨 통곡하는 그녀의 곡 위로 그의 목 주름살이 뒤엉켜 덮인다. 축 쳐진 왼쪽 눈두덩이 위로 쏟아지는 세월이 참 아프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혼자된 여자의 중년이 저지른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는 너무 억울하다. 젊은이만 다독거려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어른도 여전히 갓난아기다. 어른도 여전히 욕망을 달고 산다. 어른도 여전히 꿈에 살며, 어른은 결국 옛 시절에 품었던 향기를 찾아 다시 떠돈다. 부디 잊지 말기를, 세상이여!

 

 

 

영화 <줄리아 줄리아>, <유주얼 서스펙트>의 가브리엘 번과 <한나>와 <45년 후>의 샬롯 램플링이 주연이었으므로 꿋꿋하게 시청하였다. 인터넷 영화 소개 사이트에서 관람객 평점 4점이 되지 못하였다. 그녀 샬롯 램플링과 그, 가브리엘 번이라면 적어도 4점은 되리라 확신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평점 5점 만점에 4.2를 준다. 매우 인상 깊게 본 영화이다.

 

 

 

그가 애나의 싱글파티 첫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지나친 확대이지만 그녀 애나가 죄를 치르고 감옥을 나서는 날 형사 버니가 교도소 정문 앞에 두툼한 두부 한 모를 들고 서 있는 광경은 어떨까. 지나친가? 유치한가?

 

 

 

"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마 이 주제를, 망구 망구 할망구가 되어서도 안고 있을 것 같다. 축 늘어진 허리춤에 주섬주섬 이 문구를 꿰고 누워 내 육신을 화장터로 끌고 가리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