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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피쉬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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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위에 턱을 얹어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된다.'

이 문장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철없는 한 여자의 착각이었다. 한 소녀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길이 너무 아프다.

 

 

 

영화 포스터

 

 

내가 이용하는 영화 시청 사이트는 보고 있던 영화가 끝나면 그 영화와 관련 있는 영화를 안내한다. 알고리즘이겠지. 이 방법으로 어젯밤부터 보기 시작한 영화가 '피쉬 탱크'였다. 몸은 이미 이불속에 있었다. 내 영혼은 수면을 원하였다. 단지 습관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시작하면서 십 분여 지나도록 생각했다.

'이것을 봐, 말아?'

5점 만점에 3.5였다. 이쯤 되면 괜찮을 텐데 왜 이러지? 사춘기 소녀의 단순 방황이면서 뽀시락 장난 일기인가? 

 

 

이런 유의 영화를 보면 우리 영화 <소나기>를 생각하는 나는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나는 <소나기> 수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요즘 어떤 세상인데 싶지만,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일찌감치 내 영화 취향과는 맞지 않다 여겨졌다. 그저 사춘기를 나열하는 영화이지 않을까 싶었다. 평점 3.5도 지나치다 싶어졌다. 늘 순수 절정을 사는, 살고자 하는, 살아야 한다고 세뇌되어 살아온 바, 아무리 우리 소년과 우리 소녀들의 일상도 요즈음 이해 불가라고들 떠들지만 이상하게 15세 여학생의 인생 분투기라는 이 영화는 내게 맞지 않다 싶었다. 십 분여의 내용으로 어찌 영화 전체를 알 수 있겠는가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문제아 소녀이다. 사건 사고에 휘말린 정도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앞장섰는지, 단독 범죄행위를 저질렀는지 학교는 퇴학당한 상태다. 소녀는 빈집을 열고 들어가 춤을 추는 것을 즐겨한다. 세상을 향한 소녀의 눈에는 독기가 꽉 차 있다. '이런 개같은 세상을'이라고 지껄이는 듯, 온몸으로 자기 생각을 내비친다.

 

 

소녀는 말을 좇는다. 말(言)이 아니다. 말(馬)이다. 빈터, 소녀와 비슷한, 소녀 수준의 소년들이 집단 거주하는, 이를테면 '비행의 생'을 사는 소년들의 터에서 사육당하는 말을 좇는다. 말 달리고 싶어졌을까. 말을 묶어놓은 쇠고랑을 자르려다가 그곳 비행 소년들에게 붙잡혀 위험 상황에 처한다. 소지한 모든 물건을 빼앗긴다. 그곳 한쪽에는 소녀 또래의 소년 집단의 졸자 소년 한 사람이 있다. 그를 특별히 소개한 이유를 짐작했으리라. 언젠가 영화 속 유효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을. 

 

 

문제 소녀가 살아가기에 적절한 집안이라고 하면 고정 관념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문제 가정 속에 소녀가 산다. 한부모 가정이다. 춤과 술에 절어서 사는 젊은 어미가 있다. 소녀를 그대로 따라 하는 닮은꼴 여동생이 있다. 소녀에게는 대안학교 입학 등 퇴학을 메꿀 수 있는 여러 방법의 권고가 공적으로 집행되고 있다. 소녀는 당연히 거부한다. 소녀의 어미는 올바른 자식 양육과는 거리가 멀다. 거친 언어를 사용하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소녀의 집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들어와 있다. 차림새가 스토리의 앞날을 예고한다 여겨졌다. 엉덩이를 반쯤 내보이는 팬티 차림의 남자는 소녀의, 젊은 어미의 남자였다. 늘 그렇듯이 반항과 저항과 오묘한 여자 행세를 하는 딸들에게 어미는 한 남자를 끌어들이고 함께 당당하다. 어미는 거실에서 아무렇게나 잠든 딸들을 각 방에 옮기는 일조차 자기 남자에게 하게 한다. 어느 날, 어미를 닮아 술을 병째 마시고 취해 누운 15세의 딸을 방으로 옮기게 한다.

 

 

외간 남자가 술 취한 15세 소녀를 잠자리에 옮긴다? 어미의 새 남자가 하는 일이다.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에 옮기는 그를 나는 '신뢰'했다. 그는 소녀의 신발과 바지까지 곱게 벗기고는 포근히,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다. 믿었다. 아, 다행이다 싶었다. 이를 비몽사몽간에 확인한 소녀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 한 곳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그는 친아비를 대신하듯 '인간 지정'을 하사한다.

 

 

소녀는 어떻게 들었는지(혹은 어미의 남자가 정식으로 이야기를 해줬는지. 소녀는 그랬다고 말하는데 나는 듣질 못했다.) 새 아비의 위치에 있는 남자의 일터를 찾아가 친근감을 반사하여 가면서 용돈도 얻어낸다. 자기 진로도 상담처럼 나눈다. 금세 친아버지다운 처사를 취한다. 좋다. 믿음 가는 남자니까 괜찮다. 심지어 정말 다행이다라고 판단했다. 댄스 오디션을 보러 간다는 소녀에게 지닌 카메라를 건넨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세 여자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데려간 남자. 강에 들어가 물고기를 손으로 잡는다. 따라 들어온 15세 소녀가 뒤따라 들어왔다가 발에 상처를 입는다. 걸음이 힘든 소녀를 등에 업는다. 소녀는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웃음을 보여준다.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그의 등 뒤에서 편히 쉰다. 소녀에게 온전한 새 아비가 되어준다. 엄마의 임시방편 애인이라 여겼던 아저씨가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영화 초반 도무지 보고싶은 마음을 느낄 수 없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영화 소개글 딱 한 줄, 아니 딱 두 줄을 들여다봤다. '여류 감독이 찍은 한 소녀의 성장통 영화'라는 설명과 함께 내가 신뢰하는 '칸 영화제'의 관심작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함께 그해 심사위원상 수상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문화를 마음껏 누릴 수 없는 소도시에 사는 나는 '칸 영화제 관심작'이라 해서 뿅 가고 말았다. 기꺼이 계속 보기로 했다.

 

 

그래, 이쯤에서 성장통이 긍정으로 돌아서는구나 싶었다. 요즘 이런 유의 영화라면, 남녀 사이 어설픈 스토리가 등장하는 영화라면 당연히 진행되는 지저분한 상황이 이곳에서는 연출되지 않나 보구나. 그래, 칸영화제 작품인데. 지극히 고상한 남자가 등장하나 보다 싶었다. 다행이다 여겼다. 이어 진행될 장면들은 한 남자가 세 여자를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하는 성스러운 것들이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소녀는 남자와 제 어미의 한밤중에 정 쌓아가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다. 소녀는 어미의 행동이 궁금했을까. 아니다. 소녀는 15세이다. 소녀의 심장 속에서 어미의 남자로부터 받은 정은 주체할 수 없는 '범벅'이 된다. 15세 소녀, 자기 안에서 잉태하여 탄생하는 상황을 주체할 수 없는 인간 상태가 된다. 소녀의 눈빛에서 자연스레 드러난다. 엄마의 남자에게서 이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시도한다.

 

 

제 어미가 만취하여 남자에게 빈 시간을 준 날이었다. 취객 남자로 거실에 있는 이에게 몸을 드러낸다. 남자는 소녀에게 댄스 오디션을 이야기한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출 것을 요구한다. 너는 대단해, 네 생각대로 해. 신뢰가 산등성이처럼 쌓여갔다. 마땅한 신뢰이자 인정이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인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오디션장에서 춤추기로 했다는 소녀의 고백에 자기 앞에서 그 춤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괜찮다. 남자는 소녀를 산처럼 쌓아둔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뒤흔든다. 

 

 

거실에 앉아있던 취객, 어미의 남자가 친근감을 지니고 거실에 내려온 소녀에게 말한다.

"너 대단한 것 이미 알고 있어. 내 앞에서 춤을 한번 춰보렴. 내 앞에서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오디션장의 많은 사람 앞에서 할 수 있을까."

커다란 신뢰를 바탕으로 그가 던진 문장이 소녀, 15세에게 한없이 힘을 북돋워준다. 당신 앞에서 춤을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소녀에게

"싫으면 됐어. 네가 판단하고 행동할 일이야.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까 생각되어 말한 거야."

소녀가 그 앞에서 춤을 춘다. 남자의 곁에 앉는다. 적당한 취기의 그 남자를 소녀는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 같았다. 15세를 주체하지 못한다. 남자는 사랑한다는 말로, 그리고 실수했다는 말로 소녀를 입막음한다. 소녀는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했다 치자. 사랑했다 친다. 

'이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남자의 주문이었다.

 

 

아침이다. 어미가 운다. 자기 남자가 떠났다고 울부짖는다. 둘째 딸이 말한다. 

"떠났어."

소녀는 남자를 찾아 나선다. 일터에서는 다음 주 금요일까지 휴가라고 말한다. 소녀는 남자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남자를 만난다. 놀란 남자가 기차역으로 바래다주면서 말한다.

"내일 이야기하자."

 

 

15세 소녀이다. 앞뒤가 있지 않다. 다음이 있지 않다.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 다시 남자를 찾아간다. 문을 두드린다. 아무도 없다. 남자의 집에 숨어든다. 소녀는 남자의 현실을 확인한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아빠를 향하여 노래 부르는 귀여운 딸이 필름 속에 있었다. 소녀는 방바닥에 소변을 눈다. 남자의 가족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 뒤로 뛰쳐나온다. 

 

 

여전히 15세이다. 소녀는 서너 집 건너 길가에서 그의 현실을 확인한다. 아내와 딸과 함께 외출에서 돌아온 남자가 보인다. 소녀는 아직 15세이다. 자기 앞을 외발자전거로 달리는 그의 딸을 납치한다. 끌고 가 바닷물에 빠뜨린다. 그러나 아이를 그에게 돌려준다. 길을 걷던 그녀를 남자가 차로 뒤쫓는다. 소녀를 세워 뺨을 갈기고는 돌아간다. 

"개 같은~"

내 입에서 나온 욕설이다.

 

 

남자의 딸이 아니길 바랐다. 남자가 유부남이 아니길 바랐다. 남자의 집에 어쩔 수 없이 얹혀사는, 사별한 형을 그리워하고 있는, 남편 없는 형수와 그 딸과 남자의 어머니가 동거하기를 바랐다. 혼자가 된 여동생과 여동생의 딸이길 바랐다. 말할 수 없는 한 여자와 여자의 딸이 남자의 어머니와 동거하고 있기를 바랐다. 사족이 달리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 남자의 아내이고 그 남자의 딸이고 그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남자는, 소녀의 어머니를 현지처 삼아 한때 사랑놀이를 한 것일까. 나는 소설을 여러 편 썼다.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거침없이 자기 집을 찾아온 소녀에게 남자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한다. '사랑해'였다면 용서할 수 있을까. 이도 저도 아니다. 

 

 

오디션장에 갔지만 그곳은 소녀가 꿈꾸는 댄서를 뽑는 것이 아니었다. 섹스 심벌일 수 있는 댄스를 원하였다. 소녀는 오디션을 파기하고 돌아선다. 집에 오는 길에 말을 기르던 그곳, 한쪽에 있던 졸자라 생각되는 소년. 자기 또래의, 19세 총각을 만난다. 자기 차를 만지고 있다. 소녀가 말(馬)의 안부를 묻는다.

"19년을 살았어. 많이 살았어. 아팠어. 안락사시켰어. 오래 살았어."

소녀는 말(馬)을 묶어뒀던 쇠말뚝 앞에 흐느낀다.

 

졸자(내가 붙인 것이다.) 총각은 웨일스로 장거리 여행을 가겠다고 한다. 총각의 차를 만드는데 소녀도 일조했더랬다. 중고차 거래처에서 볼보 엔진을 훔칠 때 망을 섰다. 소녀는 총각과 함께 웨일스로 떠난다. 

 

 

인사를 건네러 간 소녀에게 술에 취하여 춤추고 있던 어미가 말한다.

"꺼져."

꺼지라고. 소녀는 집으로부터 꺼져 나온다. 전송하러 나온 소녀의 닮은꼴 동생이 차 뒤쪽을 향해 던지는 말이 이렇다.

"문자 보내는 것 잊지 마. 그리고 웨일스 사람들에게 내 안부 전해줘."

 

 

기대했던, 참 인간다운, 고상한 남자 어른과 소녀 여자의 고운 사랑 행위는 탄생하지 않았다.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한낱 희망이겠지. 한낱 우스꽝스러운 엽기가 되고 말겠지. 그러나, 진정 어려운 것일까 싶다. 이것이 성장통인가. 사춘기를 사는 소녀의 저항이 이렇게 아프게 끝나는가. 부디 함께 떠나는, 졸자라 스스로를 칭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던 19세 총각은 소녀를 하룻밤 놀이지기로 생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뇌의 단계를 겪으면서 몸을 섞기를. 몸을 섞은 다음날 상대의 몸에 성스러운 향수를 뿌려 목욕재계시켜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종일관 묶었다가 풀어헤치는, 건강한 머릿결로 세상에 자기 존재를 밝히는 여주인공 역 케이타 자비스의 연기가 참 자연스러웠다. 개같은 남자 역의 마이클 파스빈더가 있어 '칸 영화제 관심작'일 수 있었을까. 그는 연기를 참 잘한다. 보길 잘했다 싶다. 왜?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더한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딱 그곳에서 멈춘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었기에. 소녀에게 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수 있기를. 

 

 

15세 소녀가 '피쉬 탱크' 안, 가난과 혼돈 사이에서 몸부림을 쳐야 했던 좁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으로 나간다. 좁은 세계의 굴레를 파괴하는 데에 자비가 좀 있었더라면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상 수상작 영화가 아니 되었을까.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돌아보니 나는 그녀의 또 다른 작품 <로제타>를 이미 인상깊게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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