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전(消火栓)
현관 소화전 옆에 택배 물건을 놓아뒀습니다.
택배 배송자로부터 온 메시지이다. 소화전? (消火栓 : 사라질 소, 불 화, 마개 전) '소화'는 '불을 끄다'로 쉽게 알고들 있는데....., '전(栓)'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전(栓)'은 '마개'다. 병마개의 마개이다. 대체로 늘 사용하는 낱말인데 병마개가 아닌 '마개'라는 낱말만 뚝 떼어놓고 읽어보면 이 글자도 괜히 낯설다. 워낙 글로벌 세상을 살다 보니 예부터 사용해 오던 멀쩡한 글자들도 이미 저세상으로 보낸 글자처럼 의미며 글자 모양이며 어감까지 흐릿한 듯싶다. 이런.
'마개'라는 의미를 지닌 '전'자를 다음 용례로 들어 이해해보자. '마개'의 의미를 우선 살펴봐야겠지. 마개는 병의 아가리나 구멍 따위를 막는 물건을 말한다. '아가리'도 또 재미있게 들린다. '아가리'는 '어 다르고 아 다르다'라는 우리 속담에 걸맞은 낱말이기도 하다. '아가리 닥쳐'라는 관용구가 떠오르지 않는가. 얼마나 살벌한 쌍욕인가.
그래, 마개는 아가리를 막는 낱말이다. 흔히 요즈음 코르크를 많이 사용한다. 어쩌면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마개' 대신 '코르크'가 전면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나는 '마개'라 훨씬 좋다. 그러므로 '아가리'도 좋아. 심지어 '아가리 닥쳐'라는 문장도(혹은 구절에 머무를 수도) 참 좋아한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 퍼부은 적 없는 문장이지만 쌍스러움 전에 '정스러움'이 묻어나는 수도 있다 싶지 않은가.
급수전(給水栓 : 수도꼭지), 타전(打栓 : 구멍에 병마개 따위를 쳐서 막음)을 떠올리면 훨씬 쉽게 이해되리라. 의학용어로도 되새길 수 있다. 血栓 혈전, 肺栓塞 폐전색, 腦血栓 뇌혈전, 止血栓 지혈전. 우리 몸은 '돌고 돌아' 순환이 잘 되어야만 곧 '생명'이랄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된 '전'은 '구멍을 막아버린'이라는 의미를 지닌 채 쓰인 것이므로 순환의 멈춤이 되리라. 그럼 생명이 어찌 되지? 그래, 뚫릴 곳 잘 뚫려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각 기관의 구멍이 막힌다. '전'이 된다. 병 중의 병을 의미하는 전(栓)이 된다. 부지런히 운동을 할 일.
닮은 글자로 부수가 '쇠 금'인 전(銓) 자가(銓) 있다.
전형(銓衡 : 사람 가릴 전, 저울대 형). '가린다'는 뜻이다. 여럿 중 조건을 충족하는 어떤 것, 어떤 사람을 가려서 뽑아낸다는 의미이다. 생각나네. 대학입학시험. 요즈음엔 뭐라더라. '대학 입시'라는 말로 아우르던가. 아니다, '수능'이라는 낱말이 워낙 대세이다 보니 대입과 관련된 여러 낱말이 어설프다.
나는 '대입전형'을 산 사람이다. 대입전형(大入銓衡)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의 인생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순수하게 '시험'으로만 대입전형을 정식으로 치러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특별전형'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이다. 하여 말고 깨끗한 삶이다. 좋다.
'
아, 대입전형(大入銓衡)이란 말을 첨 많이도 썼는데...ㅎㅎ, 아련하다. 그 시절이 차라리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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