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e, 2014.
드라마, 멜로/로맨스, 전쟁
영국,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107분. 2015. 12. 03 개봉. 15세 관람가
감독 사울 딥
출연 미셸 윌리엄스(루실 안젤리어),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브루노 본 포크),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마담 안젤리어)
1. 2차 세계대전 중. 당연히 유대인이 등장한다.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던 곳인 독일 혹은 폴란드를 벗어나서 프랑스 쪽 영화이다. 벨기에도 당연히 연결된다. 당시 유럽의 상황, 특히 프랑스 쪽은 지금처럼 뚜렷한 국가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서구 유럽의 역사가 그렇게 지지부진했다. 19세기 초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아무튼 유럽이, 유럽의 직계 방계를 모두 아우르는 미국이 오늘날의 강대국으로 떠오르리라는 것을 그 누가 예견했으랴. 위풍당당했던 중국이여, 그리고 자체 발광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2. 원작 소설이 있다.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다는 것. 러시아 출신 유대인 작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은 유대인. 이렌 네미로프스키의 소설. 5부를 구상하여 쓰던 중 나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1942년 나치에 붙잡혔다. 아우슈비츠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조곡]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가 이 영화의 개봉과 함께 [스윗 프랑세즈]라는 원제로 재출간되었단다.
50년이 지난 후 그녀의 딸 드니즈 엡스타인-도플이 어머니의 흔적인 어머니의 노트를 읽어 나가던 중 2004년, 62년 만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세상에 공개되었단다.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가 감동과 충격에 빠졌단다. 그리고 62년 만에 영화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소설. 작가 자신의 경험담이 틀림없이 녹아있으리라 여겨지는 소설은 다큐멘터리 전문이었던 영화감독 사울 딥에게 절체절명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게 했고 그의 기록을 훑어보면 실제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를 찍기 위해 무대인 당시 프랑스의 뷔시를 그대로 재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실제 작가 자신이 피신했던 한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공을 들였다는 영화.
1부 「6월의 폭풍」과 2부 「돌체」 책이 출간된 해, 프랑스 문학상 르노도상은 생존작가에게만 상을 수여한다는 관례를 깨고 [스윗 프랑세즈]에 르노도상을 수여했다. 이 소설의 1부 「6월의 폭풍」은 1940년 파리가 함락되기 전 앞다퉈 피난길에 오른 다양한 인물들의 행로를 추적한다.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비굴할지언정, 파렴치한으로 각인될지언정 살아남아야만 했던 각양 각층의 인간군상 모습이 기록되어 있단다. 한편 그 와중에서도 묵묵히 사랑 속에 자기 존재를 굳건히 하는 부부가 등장한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참 슬프다.
3. 소설의 2부 「돌체」가 영화이다.
'돌체'란 이탈리아어로 dolce. '부드러운, 달콤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나무위키에 있는 뜻). 왜 이런 소제목을 내세웠을까. 많이 궁금하다. 작가의 뜻을 꼭 찾아보고 싶다. 왜 '돌체'였을까.
독일군이 점령한 한 시골 마을. 프랑스.
프랑스 뷔시. 독일 점령지가 되자 독일 군대가 들어온다. 남편이 참전 중인 부자님 마나님의 며느리. 피아노를 치는 낙으로 사는 그녀는 또 한 가지의 일이 있는데 시어머니로부터 소작농 부리는 일을 배우러 다닌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사실 헐거운 집안 출신이기도 하다.
그녀 집에 독일 장교가 입주한다. 그는 별스러운 독일인이다. 피아노 연주를 참 좋아한다. 피아노를 치는 낙으로 이곳에서의 전쟁 상태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녀에게 궁금증을 갖게 하는 남자가 된다. 말하자면 그는 전쟁광이 아니었다. 그저 조국의 부름 혹은 명령으로 이곳에 와 있을 뿐이다. 독일 장교도 자기 피아노 연주에 관심을 내보이는 그녀가 궁금하다. 흔히 궁금증은 곧 관심이다. 관심이 반복되면 자연 대화와 만남이 따른다. 애당초 궁금증과 관심은 서로를 향한 일맥상통의 공통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장교에게는 지방민들, 특히 소작인들에게 떠도는 그녀 남편의 비밀이 입수되고 소작인들로부터 남편의 험한 사실들과 함께 독일 장교가 입수하고 있다는 것까지 듣게 된다.
4. 삶과 죽음 교차로에서 여러 여자의 행적
여러 여성이 처한 다양한 상황 속 시점이 읽힌다. 즉 침략자의 점령지에서 침략자에게 당하는 여성의 반응을 다 각도로 읽을 수 있다. 그녀들은 각자 이유가 있다. 그녀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살아야만 했다. 혼자의 목숨으로만이 아니라 가족으로 공동체로 살아야만 했다.
성별과 나이와 계급에 따라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는 독일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십인십색, 천태만상. 젊은 여인 ‘루실’, ‘마들린’, ‘셀린’은 자신의 집까지 점령한 독일군들에게 나름의 방법으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 특별하다? 아니다. 특별하기보다는 이유 있는 반항일 수도 있다. 야금야금 먹어 치우다가 온몸의 정신으로 치닫게 하다가 짓밟으려는.
여자 주인공 '루실'은 점령군들에게 당하는 젊은 여자들, 일부러 남자들의 그곳으로 스며드는 여인네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곱씹는다. 마침내 자기 아내를 욕구 실현의 몸으로 노리고 있는 독일군 장교를 죽인 소작인 남편을 보호하는 일에 뛰어든다. 시어머니도 함께한다. 두 여자의 힘으로 생명 보존이 가능해진 소작농 남편이 독립운동가의 길로 나선다. 두 여자, 루실과 시어머니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5. 민족이라는 단어 앞에 그녀는 사랑을 내려놓는다.
“언젠가 다시 만날 거예요.”
피아노, 음악을 매개체로 하여 만난 루실과 독일인치고 독특한 독일 장교는 사랑을 저 멀리 미리 가져다 놓고 헤어지는데 남자가 죽었다. 1년 뒤.
1940년의 일이었다. 그녀는 음악을 전공했고 피아노를 치는 낙으로 당시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실’이다. 그녀의 이름.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면서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아우르던 독일 장교는 ‘부루노’이다. 당시 루실에게 현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피아노는 일상의 수호자이자 소문으로 어수선한 정체 불분명한 남편의 존재를 대신한다. 진짜 사랑의 매개체가 된다.
그녀가 참사랑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놓게 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보장되었다 싶은 신분의 남자라서? 민족정신이 투철해서? 진정, 정의를 살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다. 루실은 독일군 장교의 두 다리 사이로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자기 얼굴을 기꺼이 들이민 프랑스 여자들의 처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실은 격조 높은, 당시 상황에서는 투철한 삶이 가능한 신분의 독일군 장교와의 사랑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여자로서 여러 여자의 참담한 투신을 보고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므로 새로운 영역에서 평할 수 있겠다. 점령자 대 점령되는 자를 떠나 여성 대 남성의 겨루기를 표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은 전쟁과 점령 안에 여자들을 부산물처럼 부린다. 남성의 도구들에 머물게 한다. 모정이라는 틀 속에 가둔다. 필름 속 여자들은 늘 조력자 역이다. 한데 이 영화 속 여인들은 주체적이다. 남자를 구제해 주려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내놓고 덤비는 도전이자 용기이다. 각자 우뚝우뚝 자기 존재를 다져 세운다. 루실은 제아무리 숭고하다 한들 한낱 거룩한 사랑이 될지라도 자기 사랑을 내세울 수 없었으리라. 좀 이상한 독일군 장교 브루노 역시 루실의 행적을 뒤쫓을 수 있었지만 한 발 늦게 뒤를 밟는 것은 그녀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이지 않은가. 상대의 마음, 상대가 벌일 행위를 눈치채고, 눈 감아주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그리하여 그들은 피아노로 꽃핀 사랑을 희고 검은 건반 위에 손자국으로 남겨놓은 채 조용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6. 감독은 사울 딥.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이었단다.
그는 나에게 키아나 나이틀리 주연의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로 눈에 익은 사람이다. 그는 치밀하다.
그의 전적을 영화 여기저기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가 기록한 풍경을 재현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정하고 점령을 당하는 입장인 프랑스인, 여성들의 시점에서 바라본 전쟁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자서전적인 소설,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 그 시대의 중심에서 살다 간 여성의 이야기이므로 정직하고 진실된 사건을 절절하게 영상으로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감독은 언어로도 영화 속 긴장감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단다. 독일 등장인물들은 독일 억양을 섞은 영어로 말하도록 하고 프랑스 인물들은 억양이 섞이지 않은 영어로 말하게 하여 영어권 국가 관객들이 인물들 사이의 미묘한 계급 차이를 파악하도록 하고자 했단다. 라디오, 간판 등 들리고 보이는 모든 글씨는 프랑스어로 통일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인물들 간의 이질감이 영화 속 서로 서로가 감시하고 불신했던 모습을 더욱 부각하려는 의도도 꽃피웠다는.
전쟁, 점령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두 남녀의 사랑이 어떻게 발전되는지 또한 각각의 인물들이 전쟁, 점령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게 된다. 사랑. 그것 별것 아니다. 모든 것은 결국 ‘힘’이다. 육신의 힘이든, 정신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시대. 이렌 네미로프스키가 실제 경험한 뷔시를 재현한다!
그리고(이곳은 영화 홈에서 요약 등의 방법으로 가져온 내용들. 근데 요약을 잘 못 해 왔나 보다. 내용의 앞뒤가 안 맞다. 다시 요약해야 하는데 우선 피곤하다. )
사울 딥 감독은 1940년의 전쟁 속 사랑과 그 사랑을 일궈낸 비쉬의 모습을 재현하기 35mm 카메라로 촬영하기, 생산을 멈춘 마지막 후지 필름을 사용하기, 여자 주인공 ‘루실’의 감정 변화에 따라 그녀의 의상을 비롯한 인물의 전체적인 색채가 점차 뚜렷해지며 배경톤과 더욱 대비되는 디테일 등 섬세한 필름 구성을 위해 노력했단다. 압도적인 전쟁 씬과 비밀스럽게 전개되는 러브 씬으로 긴장감 높은 영화가 되도록 최선을 다했단다. 30년대 재즈곡부터 피아노와 현악 합주까지 동원된 ost는 영화를 보면 음악을 독하게 빨아대는 나에게 영화 깊숙이 강하게 들이밀게 했다.
0. 두 번을 봤다. 관람객과 평론가의 별점이 이렇게나 많은 차이가 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우연히 이 영화를 들먹이는 이 있어 다시 검색하다가 새삼 별점에서 뻥 터졌다. 어찌 이렇게도 다를까. 관람객들의 평점에서 한 문장 평 중 한 줄을 읽고는 평론가가 내놓은 평점에 딸린 문장은 영화를 한 번 더 본 뒤에 읽기로 했다. 처음 볼 때도 분명 이쪽과 저쪽 모든 평을 읽었겠지만 새삼 물음표가 또 생각났다. 관람객들은 10점이 수두룩한데, 영화 평론가들의 평점은 5점 혹은 6점이다. 사람이 사람인만큼 생각이 다르고 관점의 차 등이 있을 테지만 같은 영화를 보는 생각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조금 우스꽝스럽다. 어느 한쪽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평론가들의 생각은 특별한 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는 나는 그저 평범한 영화 마니아. 십여 년을 일 년에 삼백육십오 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영화 덕후!
작가의 딸 드니즈 엡스타인-도플은 “어머니가 살아오신 듯한 놀라운 감정이 든다. 나치는 어머니의 정신까지 죽일 수 없었던 거다. 이는 복수가 아닌 승리였다.”라고 어머니가 쓰신 글을 읽고 말했단다. 영화 <스윗 프랑세즈>가 완성되기 몇 달 전인 2013년 4월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난 작가의 딸을 사람들이 많이 안타까워했다는 뒷담.
한데 왜 우리나라의 영화 평론가들에게는 이 영화가 눈에 들지 않았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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