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터 정원에 반가운 꽃이 피었다.
작약.
4월 8일이 식목일이던가. 요즈음 식목일은 범국가적인 행사에서 멀어졌다. 내 어릴 적 '식목일 행사'는 전 국가적으로 학교 등에서 꽤 거창하게 진행했다. 우리 집에서도 '식목일'을 거창하게 진행하였다.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대문에서 바라보자면 건물 오른쪽이 부엌이었다. 부엌 옆에 장독대가 제법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담벼락과 장독대와의 사이에는 화단이 있었다.
식목일이면 아버지는 내 남동생과 내가 함께 하는 식목일 행사를 치르셨다. 겨우내 양분을 취하지 못해 메마르고 거칠어진 땅덩이를 괭이와 호미로 잘게 부수게 하셨다. 흙의 본모습을 복원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 묘한 냄새가 뒤범벅인 퇴비를 섞으셨다. 아버지는 미리 마련해두신 양분을 흙에 섞어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 배 부르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배부른 것은 아니다. 꼭 주변을 살펴봐야 한다. 더군다나 흙에서는 우리 먹을 것이 자라는데 꼭 살펴야지, 꼭!"
보송보송 살진 흙을 품게 된 화단의 긴 직사각형 모양에 금을 그으셨다. 화단을 둘로 나누셨다.
"위쪽은 누나 화단이고 아래쪽은 동생 화단이다."
욕심 많은 동생을 잘 아는 아버지는 동생을 향해 무언의 압박을 가하셨다.
'욕심부리지 말아라.'
그러나 길이나 넓이를 채 느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동생은 툴툴거리면서 억지를 부리곤 했다.
"누나 땅이 훨씬 넓은데요."
손수 모범을 보이시면서 우리에게 고랑을 만들게 하신 아버지는 고랑을 곱게 걸어 이랑에 서게 하셨다. 이랑에 비슷한 길이로 간격을 잡아 구멍을 파게 하고는 미리 준비해 두신 꽃씨를 심게 하셨다. 우리는 꾹꾹 꾹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 속에 잘 자라라는 소원을 담아 씨를 깊게 담았다. 토닥토닥 '신혼의 아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 쓰다듬듯'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흙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버지는 씨앗이 너무 깊이 있으면 숨을 못 쉬니까 싹을 만들 수가 없다고 살짝 깊이를 낮춰 씨의 위치를 조절하셨다. 너무 얕게 놓인 씨앗도 조금만 거칠게 비 내려도 쓸려 내려가 버려진다고 하셨다.
"생명을 싹 틔우지 못하면 얼마나 불쌍하겠냐?"
아직 자리잡지 못한 씨앗을 꺼내어 우리는 좀 더 깊게 심었다. 이어서 물뿌리개와 물조리개에 대여섯 번 물을 채워 화단 곳곳을 다닌다. 씨앗 가득 촉촉하게 물맛을 보게 한다. 어서 씨앗들에서 싹이 트고 그 싹이 쑥쑥 쑥 자라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한다.
화단에서는 한두 주일 뒤 틀림없이 싹이 돋았다. 화초의 길이가 길어졌다. 전 잎(마른 잎)을 조심스레 따주면 몸통도 제법 통통해진다. 화초들은 안정감과 함께 잘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드러낸다. 잎은 넓고 크게 확장되어 따순 봄 햇살을 가득 온몸으로 삼켰다. 잎의 색은 짙은 녹색으로 무르익어 우리들의 눈을 편안하게 한다.
한 달, 혹은 두 달이 다 되기 전에 마침내 송이송이 꽃송이가 만들어진다. 꽃송이 여물면 혹여나 활짝 피지 못한 채 사라질까 봐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통 장난으로 세상을 살던 내 동생도 그때만큼은 제법 진지해졌다. 물뿌리개를 들고 다니는 시간이 길어진다. 물론 '화초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물을 많이 주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봉숭아, 채송화, 분꽃, 붓꽃 그리고 나팔꽃도 함께 자랐던가.
그러나 비교적 작고 여리고 부드러운 꽃을 피우던 화초들 사이 유독 도드라지는 강한 기운의 꽃이 있었다.
작. 약.
작약은 아버지가 심으셨다. 이제 보니 '구근'은 우리들이 기르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기억 속에 우리들이 구근을 만져본 기억은 없다. 어느 날 밤새 꽃들이 새로 피어나지 않았을까 싶어 화단에 나가면 떡 하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녀석. 대왕대비 마마 차림으로 둥근 꽃봉오리를 내놓던 작약.
"와, 누나야. 이 꽃 진짜 이쁘다야."
"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꽃이다. 분명히 제일 크고 이쁜 꽃일 거야."
이제 그 시절 내 아버지의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은 나는 베란다 가득 화초를 키우면서 아버지를 늘 떠올린다. 아버지를 닮아 나무 욕심이며 꽃 욕심이 많다.
구근 몇 키워냈지만 아직 작약은 내 베란다 화초 목록 속에 있지 않다.
아하, 사실 내 어릴 적 '작약'은 '함박꽃'으로 더 익숙하다. 같은 말로 알고 있다.
조사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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