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오후 내내 집안을 걷고 싶었다.
생각한 것은 오래전부터
마침내 걷기 시작한 것은
오늘 오후 두 시 사십육 분쯤.
나는 늘 걷고 싶었다
하염없이 걷고 싶었고
목적지 없이 걷고 싶었고
그냥저냥 걷고 싶었고
아무것도 짐 지지 않은 채 걷고 싶었고
마침내 내 뇌리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버린 채 걷고 싶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걷고 싶었고
시간이 없는 공간을 걷고 싶었고
유물이나 유적이 없음은 물론
잠시 후 혹은 조금 후 혹은 내일 혹은 먼 미래 등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걷고 싶었고
과거를 전혀 끌고 오지 않은
오늘을 있는 그대로
그냥 걷고 싶었다
나를 잊기 위해서
너를 잊기 위해서
우리를 잊기 위해서
나날을 잊기 위해서
생을 잊기 위해서
걸으면 혹 한 눈금이라도 지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뿌린 흔적들 단 한 티끌이라고 밟아 뭉그러뜨릴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밟은 땅
그 땅을 만드는 흙 속으로
나의 존재가 묻힐 수 있을까 싶어서
자, 걷는다 걸을까 걸어
걸음이 부리는 리듬은
반점일까
온점일까
느낌표일까
물음표일까
이런 심정의 날이 있었단다. 임시 저장 글 창고에서 빼 왔다. 종일 바빠서 아침 일기는 커녕 이곳 문도 열지 못했다. 오늘 어떤 내용의 글을 쓸까 하다가 일백의 숫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임시 저장 창고 글의 수를 확인하고는 글 한 빼오기로 하고 클릭을 하니 이 글이다.
위의 시라고 하는 글은 유월에 쓴 글이다. 쭉쭉 늘어진 채, 소위 행의 형식으로 글을 썼다 싶어서 부끄럽지만 '창작'으로 속하게 한다. 종일 걷고 싶었다는 심정의 시(?)를 찾아 올리는 오늘, 나는 너무 바빠 실내운동도 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출퇴근길 걷기, 그것도 단거리 출퇴근길 걷기로 운동을 끝냈다.
내일도 어서 일어나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 어서 자자. 모두 잘 주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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