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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행복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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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속도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2021 개봉  전체 관람가 

박혁지 감독

이라가시 히로아키, 이시타카 노리히토 등 출연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큐 영화 행복의 속도

 

 

우리나라 사람 박혁지 감독의 영화다. 검색해 보니 그가 만든 다섯 편의 영화는 모두 '다큐'이다. 그의 다큐마다 평점이 모두 8점대 이상이다. 메가 tv에 있다면 네 다큐를 이어서 모두 보려고 한다. 

 

연기는 모두 실상이다. 즉 직업 연기자들이 출연하지 않았다. 출연이라는 낱말이 어색하다. 생 다큐이다. 실 생활을 담았다. 감독의 주문이 전혀 없었단다. 어떤 영화적인 지시도 없었단다.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필름에 담았단다. 감독이 말했다. 

"늘 각자의 길 위에서 고군분투하시는 모든 분들께 힐링과 응원을 드립니다."

나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  포함되고 싶다.

 

 

 

산장으로 가는 짐

 


봇카.

 

 

 

처음 들어본 낱말이다. 일본어이다. 歩荷. 한자를 해석해 보자. 걸을 보에 멜, 짊어질, 부담할 하이다. 보하. 일본어로는 '봇카'인가 보다. 해발 1500미터의 고산, 천상의 정원이라 불리는 오제라는 곳에서 봇카로 생계를 잇는 젊은이들이 있다. 오제. 그곳에서 봄부터 계속할 수 있는 일인 '지게꾼'을 일컫는 용어이다. 천상의 정원 오제에는 여러 산장들이 운영되고 있다. 초봄부터 한겨울 이전까지인 듯. 

 

 

박혁지 감독은 왜 '봇카'를 택했을까. 그것도 일본인데. 우리나라에도 있지 않은가. 지게꾼. 아, 우리나라에서는 시골 산장 같은 곳에서 지게꾼으로 일하는 젊은이를 찾기 힘들다. 최근 들어 거의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펜션이라고 해야 할까. 높은 고산지에 있는 펜션. 하긴 사방으로 뚫린 우리의 길은높디 높은 곳 어디라도 지게가 필요하지 않다. 차로 슈웅 간다. 차로 갈 수 있는 범위 안에 대부분의 산장, 즉 우리나라의 펜션은 존재하지. 참, 설악산에는 한 할아버지가 계셨지.

 

다큐 속 봇카는 '자본'과 나란히 간다. 자본 속에 함몰되거나 포함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존재이다. 봇카를 주도하는, 즉 다큐 속 두 주인공인 젊은 사람들은 자본과 병행하되 끊임없이 자아 추구를 고뇌한다. 끊임없는 생의 번뇌를 짊어지고 들길과 산길을 걷는다. 오르내린다. 뭐 그렇다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철학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두 젊은이. 이라가시와 이시타카. 둘 다 가정이 있다. 자식이 있다. 생을 함께 고민하는 아내가 있다. 70~80kg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이 젊은이들은 막무가내로 자본을 좇지 않는다. 걷는다. 짊어진 짐이 무거운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청춘이 지닌 열정을 쓰다듬으면서 미래를 고민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자본으로 기울어야만 살아낼 수 있다는 압박감을 억누르면서 진정 내가 내 가족들과 함께 추구해야 할 행복의 실체를 어떻게 구상하고 계획하고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가를 자문자답하면서 걷는다. 혹 내 주관이 너무 엉뚱한 것을 아닐까를 수없이 되짚어 본다. 내 생각이 맞다. 감독의 의도와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봇카 젊은이들은 아내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우리들의 행복'을 묻는다. 부모의 충고와 조언도 접수하여 분석하고 판단하고 더하고 뺀다. 아내의 힘 북돋움과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답으로 진정한 행복의 바탕을 튼튼하게 세우고자 한다. 하여 자기 행복의 세계를 우리들의 행복이 지닐 부피로 두툼하게 부풀려 갈 것을 다짐한다. 

 

두 젊은이는 '오제'에서 일하는 지게꾼 '봇카'이다. 한편 두 젊은이의 삶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봇카라는 소득의 도구 위에 이 둘이 추구하는 것과 삶의 방법이 조금 차이가 있다.

 

안경 속 이시타카는 선구자형이다. 봇카라는 직업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단체를 만들어 단체의 의지 및 노력과 구속력 등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봇카를 세상 위로 끌어올리고자 한다.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짊어진 것이 이유인지 이시타카는몸이 아프다. 아내도 걱정이 된다. 둘은 어둡다. 아내도 집에 틀어박혀 고민만 하고 있는 축이다.

 

 

이라가시는 기꺼이 즐겁게

 

 

이라가시가 산장에 가서 아들과 함께 본 밤하늘의 별들

 

 

이라가시는 생활을 즐긴다. 사진기를 최신형(?)으로 사고 자연들을 사진기 속에 접수시킨다. 아이들과 잠자리를 잡으면서 여가 생활 속 여백을 즐긴다. 아내와 수시 봇카 이야기를 나눈다. 아내도 앉아만 있지 않는다. 노동에 나선다. 이라가시는 봇카의 길에 큰 아이도 참여시킨다. 함께 산장에 머물면서 우수수 빛을 발하는 별밤을 만끽한다. 자기 중노동의 현장을 자연 속에 파묻히게 하여 영상에 담는다. 어머니에게 보여드린다. 어머니가 아들의 직업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되찾아보게 한다. 할미와 손자가 눈싸움을 즐긴다. 할머니와 손주, 며느리의 골목길 눈싸움이 인상적이다. 이라카시의 봇카 작업 모습이 부모 앞에 동영상으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짐이나 짐 진 아들은 대화에 올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반사된 눈구름이 아이 예뻐라. 좋았겠다. 나도 가고 싶다.". 

"나무까지 예뻐. 사진 속 풍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동물 발자국도 있어."

어미가 아들의 막노동을 모를 리 없다. 아마 아들의 직업을 저 높이 올려놓고 싶은 세심함일 것이다. 온 가족의 식사 자리는 부드럽다. 

 

 

 

봇카의 사람들 균형이 최고의 덕목인 듯

 

 

이시타카는 기타 연주도 즐겨하는 연주자이다. 봇카의 계절이 아닐 때에는 도쿄로 와서 제설꾼으로 일하기도 한다. 봇카에서 얻는 보람을 묻는 친구들에게 이시타카가 답한다.

"그런 질문을 많이 들어. 어떻게 저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느냐. 대단하다. '대단하다'에서 보람을 느껴. 그리고 짐을 옮겨주면 고맙다고 말하는 이들. '고맙다'에서도 느끼지. 보람을!"

이시타카네도 부모님 댁에 온다. 아기가 오랜만에 본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어 울음을 터뜨리나 혈연임을 직감하고는 곧 할머니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참 집밥을 구세대와 신세대가 맛나게 섭취한다. 어머니는 이시타카의 건강을 걱정한다. 공무원이 좋겠다. 월급 또박또박 나오는 공무원. 어느 일인들 몸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이시타카 곁에서 아내의 얼굴도 무겁다. 

 

산장이 있어야 일한다. 한겨울에는 문을 닫는다. 일할 수 없으면 도시로 나와 제설작업 등으로 소득을 취한다. 몸이 걱정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어느 일인들 몸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냐고 답을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자기 몸이 걱정된다. 이시타카는 사실 발이 아파 한동안 봇카를 멈췄던 기간도 있었다. 

"무엇인가 한 가지 전문적으로 해 보고 싶어."

이시타카가 도쿄로 떠나면서 말한다. 아내가 묻는다. 

"어? 눈 치우기 전문이랄지?"

"무엇이든지 '전문'을 붙이면 있어 보이잖아."

 

현대와 현세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틀림없는 '자본주의'이다. 솔직히 말해 '전문적'이야말로 자본이 만든 사기성 짙은 경제 용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전문직이다. 특별할 경우가 아니면 따박따박 임금이 나오는 전문직. 얼마나 평온을 장담하는 멋진 낱말인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절대로 멋진 일이지 않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을 말한다.

전문직은 사람을 옥죄인다.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살아야 한다. 직업 외 부업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취미 삼아 혹은 자원봉사 삼아 다른 일도 해낼 수 있지 않은가. 너무 좁게만 생각하지 말라는 반응이 있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사고력과 판단력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전문직은 사고의 범위가 좁다. 딱 그 안에 사고의 내용이 좁혀진 채 머물러 있다. 판단력은 그 사고의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너무 먼 길로 나아갔다. 돌아온다. 

 

 

박혁지 감독은 이 두 젊은이의 생활 방식 및 생각의 차이에도 관객들이 집중하기를 바라는 듯싶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가벼운 마음으로 현실을 수긍하면서 낙관적으로 살아가는 이라가시인가 어둡고 무거운 이시타카인지를 자기 삶 속에서 찾아보라는 것일 게다. 긍정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라면. 보다 가볍게 접근하길 바라는 것이라면. 내게 꼭 들어맞는 주문이다. 나를 돌아본다. 늘 암울함에 피트를 맞추면서 사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래, 그리 부정만 하고 음울만 챙겨서 되는 일이 무엇이던가?'

없다. 부정과 음울과 걱정 근심의 생각  끝에는 똑같은 어두움뿐이었다. 반성한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굳이 편 가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저 과정의 차이일 뿐! 사람들은 늘 '긍정적으로 살아라!'를 외치지만 글쎄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는 없다. 다만 주변인들을 편한 게 한다. 하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커다란 삶의 운치이냐.  

 

 

 

이른 봄날, 이시타카는 봇카에 다시 돌아와 무거운 짐을 들고 산장으로 오른다. 주위 산장에서 삽을 얻어 이시타카가 돌아올 길의 얼음을 치우는 이라가시. 이라가시는 1년을 봇카로 살다가 너무 힘에 겨워 봇카를 그만둘까 한다. 이시타카가 새 해 첫 짐을 지고 나섰던 길에서 돌아온 뒤 둘이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다.

"섬세해야 하고 균형을 맞춰야 하고 힘보다는 기술이고......."

 

 

일단 다시 돌아가서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누는 눈싸움의 장면!

 

 

 

감독의 말

 

 

 

박혁지 감독의 작품 제작 의도처럼 

'당신은 지금 어느 길 위에 있나요?'

'당신이 가고 있는 행복이라는 길의 속도를 점검해 보라.

라는 문장을 되새기면서 천천히 일요일을 접을 준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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