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웨인 :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
영국 드라마
2022. 04.06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112분
윌 샤프 감독
베네딕트 컴버배치, 클레어 포이, 올리비아 콜멘, 토비 존스 등 출연
'CG 없이 진짜 고양이들을 담았다.'
영화를 보기 전 나는 '꼭 봐야만 하는 영화'인지를 가늠하기 위하여 가끔 그 영화 메인을 열어 확인하는 것이 있다. 평점. 시청자들의 평점이다. 거기에서 '이것을 봐야 하나 말하야 하나'의 분기점에 놓이게 되면 평론가의 평점까지 읽는다. 특히 이동진을 읽는다. 위 평점 한 문장은 시청자의 평점이다. 아, 이 영화는 꼭 봐야 되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하는 평점은 아니었지만 일단 열심히 만들었겠구나 싶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이라지 않나. 연기파 여배우 클레어 포이에, 찐 연기파 배우 토비 존스 님이 함께 한다니. 보자. 딱 거기까지만 봤다.
기본 정보도 검색하지 않았다. 몇 대표 포스터만 읽었다. 서너 장면. 그 서너 장면은 온통 행복 가득한 모습의 베네딕트가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오랜만에 찍은 사랑 영화란다. 보자. 평생 그림으로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곤 하는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루이스 웨인을 몰랐다. 이런~
포스터 한 장을 골라 자세히 읽었다.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루이스 웨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그렸다. '닥터 스트레인지' 속 그를 그린 후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것이 이 영화 포스터 속 그를 그리게 된 이유였다. 앞서 개봉한 영화였다. 포스터 속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머리 위에 귀여운 고양이를 앉혀 고양이에 대한 휴머니즘(?)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낯설었다.
"어어? 배네딕트 컴버배치가 이런 영화를? 이렇게나 밝은 사랑 영화를? 에구구구 구, 닭살~"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로, 즐겁게 진행되는 영화려니, 사람을 귀찮게 하는 동물로의 고양이에서 벗어나 멋진 반려묘의 자리로 들어 앉힌 과정을 그린 영화려니, 그와 고양이 사이를 화사하게 맺어준 한 여자가 있으려니, 그 여자와의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려니.
최근 들어 거의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내 운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가벼운 사랑 이야기라지 않는가. 경쾌하게 운동을 함께 하자. '건강한 허리 보존을 위한 다리 높이 올려 걷기' 백 개를 하면서 영화 시청을 시작하였다.
루이스는 내성적인 사내였다. 어릴 적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현병은 계속된다. 그리고 루이스는 가문의 장남이자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다. 죽은 아버지. 노동이 불가능한 어머니. 세대를 초월한 여동생들. 다섯? 여섯? 동생들은 두세 살, 혹은 서너 살 터울로 쭈욱 늘어서 있다. 맨 아랫 동생과 루이스는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가 나리라. 첫째 여동생이 집안 살림을 총괄하여 꾸려 나갔다. 그녀는 가정이 유지되게끔 했다. 그녀뿐이었다. 남은 식솔들은 모두 베네딕트, 즉 루이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린 동생들을 위한 가정교사도 들인다. 첫째 여동생의 구상과 계획에 의해 가문의 역사와 가문의 현재가 진행된다. 그래, 루이스 네는 '가문'이 적용되는 고위 신분이었다. 루이스는 가문과 가문에 속한 채 노동 없이 사는 여자들을 위해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했다.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온 가족이 손을 벌리고 있는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살림꾼 여동생이 어린 여동생들을 위한 교육까지 포함한 가정사 전반을 알차게 꾸려내므로 그는 오직 돈만 벌어오면 됐다. 열심히 벌었다. 열심히 그렸다. 내 가장 부러워하는 '속사포처럼 빨리 그리기'를 그는 기가 막히게 잘 해냈다. 정말로 부러웠다. 타로난 그림쟁이였다. 그림 팔이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다행스럽게 평생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어주는 언론계 재벌남(토비 존스 분 - 이 남자는 참 연기를 잘한다. 어떤 종의 영화를 만나도 그 영화, 그 배역에 맞게!)도 만난다. 즐겨 그리던 박람회장 실사 과정 중 기차 안에서는 생의 끝자락에서 큰 일을 해 주게 될 한 사내를 만난다.
루이스는 또 언청이였다. 덥수룩한 수염으로 숨기고 있었다. 이름 있는 가문의 언청이 그림쟁이 총각에게 이웃은 늘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 성인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사람들 사이 그의 흠이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살림꾼 여동생이 집안으로 사랑을 모셔왔다. 어린 여동생들의 가정교사.
으레 그렇듯이 떠돌이 가정교사인 그녀는 지식을 담고 있되 한편 생의 아픔을 지닌 여자. 그녀는 옷장 안에 숨은 채로 루이스를 첫 대면한다. 루이스의 옆방에 거주한다. 루이스와 그녀 에밀리가 첫 만남의 식탁에서 나누던 은밀한 눈빛을 확인한 여동생이 둘 사이에 선을 그으려 든다. 여동생에게는 루이스의 사랑이 아니라 온 가족의 한 끼 식사가 중요했다.
사랑은 주변 지인들이 만든다. 진리이다. 자, 주위, 사랑으로 산다는 남녀를 보라. 찐 사랑으로 산다는 남녀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랑을 방해하던 지인들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가정교사 에밀리는 나이도 많고(루이스보다 많았던가?)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
루이스와 에밀리는 하늘이 점지해 준 짝이었다. 무엇보다 각자 자기 생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꿈틀꿈틀 세상을 꾸려나간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향의 남녀. 그러므로 둘은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분배해야 하는 소란스러움을 행하지 않는다. 분가하여 둘 만의 공간을 꾸며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 생을 알차게 꾸려가면 된다. 최소한의 것,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만 서로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삶. 나도 이런 삶이 무지 좋다. 그리고 그런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리하여 이 둘의 사랑이 더 안타까웠을 게다. 왜?
이 영화는 한 화가의 전기적 영화이다. 실화이지 않은가. 실화를 영화로 옮기려면 커다란 반전, 즉 영화스러운 반전 스토리가 실화에서 진행되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에밀리, 사랑스러운 에밀리. 언청이 루이스를 제 안에 미남으로 앉혀두고 사는 에밀리가 생의 마감이 정해진 질병을 앓고 있다. 유방암 말기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축으로 존재하는 씬은 에밀리가 유방암 말기 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영화니까 그렇겠지? 아니다. 둘 다운 반향이었다. 둘은 말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묵묵히 살아낼 것을 침묵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비 내리던 날. 음울을 담은 울음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는 고양이를 찾아 둘은 한 우산 속을 함께 걷는다. 고양이를 찾아가는 둘의 상체가 서서히 꺾이면서 찍힌 몇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각도이다. 둘이서 한 호흡으로 고양이에게 다가가는 꺾임의 미세한 변화. 명 장면이다.
고양이 '피터'와 함께 한 삶은 루이스와 에밀리 생의 최고였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야 한다. 유방암 말기였다. 더군다나 1900년 대 초. 의약 분야의 발전도 지금과는 천양지차. 다행히 언론 재벌 지인이 루이스에게 아내 에밀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루이스는 '피터'를 시작으로 이 세상에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그린다. 당연한 일. 루이스의 고양이 그림은 당대의 미술 주류가 되고 루이스는 유명 인사가 되고 경제적 풍요도 누리게 한다. 에밀리는 잠깐 '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에밀리가 루이스의 생을 염려하면서 말한다.
"루이스. 세상은 아름다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알게 해 준 이는 당신이야. 루이스.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나누세요. "
"당신 속에는 언제나 내가 있어.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미래에는 당신이 나를 생각했으므로 내가 존재하는 거야. 미래에도 내가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을 거야."(이 문장은 에밀리의 생각을 내가 문장으로 만들어 옮긴 것. 당연지사. 에밀리의 생각이 이랬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나는 병행하던 실내 운동을 멈췄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하는 '뒤꿈치 들어 올리기 100개'를 하고 있었을 게다. 백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나는 거실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밀리의 죽음 이후에도 루이스는 여전히, 거의 모든 나날을 어머니와 여동생과 가문을 위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엔딩에서 나는 그만 기진맥진해진 채 눈물 한 방울을 또옥 떨어뜨렸다.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루이스 웨인. 그의 생이 너무 참담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데. 요즘 화가들을 봐라. 소위 떴다 하면 그깟 경제야 뭐가 문제인가. 돈 있으면 되지 않느냐. 있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 바닥을 기게 되는 삶이라면 동정하지 말아라. 그래, 결국 당사자 탓이지. 더군다나 당대, 살아생전 세상을 뒤흔든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사자의 능력, 의지, 인간관계, 사회성 등이 문제이지 않을까. 당대 유명 화가였으니 어떤 문제들이 발생했더라도 넉넉한 돈으로 아우를 수 있지 않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가 살아낸 비참한 생은 잘 그리는 그림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늘은 그를 점지하여 세속과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운명을 살게 했다. 그런 그에게 짧은 생을 마감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다섯 여동생의 삶을 보따리에 한 데 담아 그의 등에 짐 지웠다.
루이스는 조현병이었다. 어릴 적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안고 있던 원죄였다. 원죄라니. 운명이라니, 천운이라니. 죄송해요, 루인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조현병이었어요. 아마 가족력이었던 듯도 싶어요. 동생 마리, 첫 생리에 놀랐다가 마침내 여자가 되었다는 언니의 위로에 '나는 드디어 여자가 되었다.'라고 외치고 다니던 아이. 그 아이 마리도 조현병이었지요. 사망 시 병명은 감기였던가요? 마리의 죽음이 당신의 조현병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 듯 싶기도 해요. 물론 에밀리의 부재가 당신 남은 생을 휘저은 근본적인 원인이겠지만요.
조현병과, 그림과는 별도로 루이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했던 주제가 있었다. 전기. '전기'를 향한 과한 열정(당시 산업사회, 식민지주의를 호령하였으나 종이호랑이가 되어가던 영국의 제국주의 여파인 듯도 싶다. 루이스의 '전기'를 향한 탐구를 주제화하여 연구했다면 어땠을까도 싶다.)이 한 데 뭉쳐 루이스의 남은 생을 더더욱 폐허가 되게 한다. 그 와중에도 루이스는 자신을 제지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외쳤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내가 에밀리를 떠올리면 에밀리는 미리 미래에 와 있어. 미래에 존재하는 거야."
에밀리의 유언은 곧 루이스가 남은 생을 지탱하게 하는 지표가 된다.
에밀리 죽음 이후 루이스의 생은 구구절절 기록하지 않겠다. 스포이다 싶어서가 아니다. 그의 후반부 생이 너무 안타깝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0)' 그에게는 결코 쉬게 할 수 있는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생을 마친다.
그가 남긴 화폭 속 수많은 고양이들은 그를 고마워할까. 생은 참 자기 터를 사는 사람들을 고까워하니 이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 기차에서의 낙상 사고. 그래. 사람이다 루이스도. 루이스도 사람이다.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아무런 노동 없이 처마 끝 참새 새끼들처럼 입을 연 채 루이스를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와 동생들. 그녀들은 왜 태어났을까. 어쩌자고 그 많은 그녀들을 번식시켜 놓고 그의 아버지는 운명을 다한 것인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대체 가문이 뭐길래 자리보전만을 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루이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참 어리석었다. 다행히 온갖 어리석음 저항과 때로 목숨까지 담보로 잡힌 채로 켜켜이 무너뜨려 온 역사 있었다. 그리고 참 사람살이가 되게 하여 현재 여기까지 오게 한 조상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그의 '고양이'들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마추어 미술작품 콜렉터이기도 한 나도 한 작품 꼭 갖고 싶다. 루이스 웨인의 전기적인 삶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라는 속담을 실감하게 한다. 그의 생이 고양이를 그린 것 만으로는 대단하고 가치있고 행복까지 했을 수 있겠다. 물론 여차여차하여 제아무리 머리 굴려봐도 결국 생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공통의 모양새를 하고 있더라는 것을, 우리 깨닫는 다면? 슬프지만 말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러한 삶은 지구 생명체 모두 숙명이라는 문구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자. 살자, 살자, 살자.
'문화·예술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후의 두 여자 (9) | 2022.07.17 |
---|---|
행복의 속도 (8) | 2022.07.17 |
사랑이 지나간 자리 Palm Trees in the Snow, Palmeras en la nieve (12) | 2022.07.03 |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18) | 2022.07.02 |
사마에게 - '어른'이어서 부끄럽다 (14) | 2022.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