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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사람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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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3주... 그리고 2일 - 사람이 무섭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Luni, 3 Saptamini Si 2 Zile, 4 Months, 3 Weeks & 2 Days, 2007

드라마/ 루마니아/ 112분/ 2008. 02. 28. 개봉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

아나마리아 마린차(오틸리아), 로라 바실리우(가비타), 블라드 이바노브(베베) 출연

청소년 관람불가

 

 

대표 포스터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이태 전, 2021년은 내 직장생활 중 가장 힘든 해였다. 대체로 인덕이 있어 산다고 생각하는 내게 황당무계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난도질했다. 나의 여린 마음을 문드러지게 했다. 참 많이 힘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해 끔찍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해 퇴근 후 줄곧 어떤 일을 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했다.

 

그해 한 해 동안 나를 환장하게 했던 매일, 견딜 수 있게 한 것이 '영화'였다. 19금 공포 영화를 매일 하나 혹은 두 편씩 봤다.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견딜 수 있었다. 종일 쌓인 분노를 수그러지게 했다. 속된 말로 미쳐버릴 것 같던 순간을 다독거렸다. 사람을 지치게 했던 사건들을 나의 사고 밖 무덤을 만들어 묻어버릴 수 있게 했다. 19금 공포 영화를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300여 편은 봤다. 

 

오늘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봤다. 내가 평소 영화를 보는 방식 그대로였다. 앞서 본 영화가 나를 붙잡았을 때 함께 소개되는 영화 속에서 다음 영화를 선택하여 시청한다. 선택 기준은 무료 감상이 가능하고 5점 만점에 3.7점 이상의 평점을 받아야 한다. 화보로 혹은 제목으로 혹은 출연 배우나 감독의 이름으로 영화를 시청하기도 한다. 오늘 영화는 평점 4점이 넘었다. 무엇보다 나의 당당한 영화 선택 기준으로 볼 때 아카데미보다 훨씬 다양한 영화 속에서 택해 시상한다고 여기고 있는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었다. 

 

 

루마니아 영화이다. 1987년. 차우체스쿠 독재 정권 시절이다. 이 정권의 끔찍함을 여러 뉴스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독재라는 것이 참 무섭구나. 임신이며 낙태까지 저울질하여 인간을 집어삼킨다. 신문 기사로만 봐 온 독재는 사람을 짐승으로 몰아갔다고 한다. 정치. 징그러운 짓이다. 나는 늘 무정부주의를 꿈꾼다. 정치인들의 피도 하늘이 내린 은혜가 아닐까. 그들 정치인의 입장에 서보면 말이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독특한 제목이다. 제목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한다고들 하지만 이 제목에서 느끼는 파행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런 스포 없이 영화 보기를 시작했을 때 말이다. 물론 파행이라 여긴 만큼 이 제목이 담고 있는 의미에 관심 또한 치솟아 있었다. 영화는 영화 속 실사를 내가 사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였다. 보고 나니 그렇다는 것이다. 들여다보면 참 안타까운 의미를 담고 있는 제목이다. 그렇다면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잘거리면서 꿈을 다져가기에 바쁜 젊은 처자들이었다.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오틸리아'와 '가비타'는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이다. 영화는 가비타가 어디론가 떠날 준비에 바쁘고 이 걸음에 발맞추는 오틸리아의 기숙사 방에서 시작된다. 전혀 스포 없이 본 나는 독재 혹은 전쟁을 살아내는 젊은이들의 저항을 담아낸 것인가 싶었다. 사실 너무 많은 영화를 봐 와, 늘 진행되는 독재 혹은 전쟁을 견뎌내는 젊은이들의 생이려니 싶어 4.1의 평점은 얼마나 큰 저항을 담고 있을까 싶었다. 한편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권력에의 저항이 담긴 영화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봐 왔다. 한편 그런 영화에 지쳐 있기도 했다. 어제 올린 이곳 블로그의 글의 주인공이셨던 화가 김창열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저 '순환'에 그치는 역사이다 싶어 인간계의 한계이지 않은가 싶은 생각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영화는 오틸리아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어느 날 허름한 호텔에 들어선 오틸리아가 사전 예약을 확인한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2박 3일의 호텔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곳에 가비타가 들어서고 '베베'라는 한 남자가 이어 입장한다.

 

베베. 그는 불법 시술자이다. 낙태 시술자. 가비타가 임신 상태였다. 이를 오틸리아가 도와준다. 가격 흥정을 한다. 그래, 좋다. 불안과 불법, 법의 심판을 각오하고 하는 일이니, 더군다나 사람을 치 떨리게 했던 차우체스쿠 독재기이니 가격 흥정은 한다고 치자. 베베는 두 여자에게 낙태 시술 조건으로 또 한 가지를 요구한다. 끔찍한 짓거리였다. 오틸리아는 생리 중이었다. 가비타는 낙태를 하러 왔다. 짐승보다 못한 놈, 베베. 이런, 오 이런. 

 

짐승 베베가 내뱉은 문장들이다.

"4개월부터는 낙태가 아니고 살인이에요."

"태아를 변기로 버리지 말아요. 막혀요."

"10층 정도의 아파트에 올라가서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오틸리아와 그녀의 남자 친구 :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여. 그러나~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오틸리아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다. 무슨 일인지 듣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묻는다.

"내가 임신을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구구절절 변명해 대는 남자 친구에게 묻는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럽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부끄럽지 않아?"

오틸리아의 방법은 과연 옳은 것일까. 꼭 그런 방법에 응해야 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끔찍했다.

 

 

오틸리아는 왜 1 - 영화 홈에서 가져옴

 

 

오틸리아는 왜 2 : 왜 이 장면, 오틸리아의 이 모습은 가장 인상적인 씬이었다.  - 영화 홈에서 가져옴

 

 

호텔 식당에 내려와 있던 가비타가 일을 처리하고 온 오틸리아에게 말한다.

"배가 고파서, 배가 너무나 고파서."

이어 하는 말은 또 이렇다.

"우리, 앞으로 이 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대체 가비타는 어떤 명목으로 오틸리아를 끌어들인 것인가. 룸메이트일 뿐인데. 왜 자기 일에 단지 룸메이트인 오틸리아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베베의 말마따나 자기가 즐긴 일로 왜 룸메이트를 끌어들인 것인가. 영화 흐름으로 봐서 가비타는 강간에 의한 임신은 아니었다. 

'이런 못된 년!'

나는 원색적인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를 뒤흔드는 문장이 있었다. 자기 남자 친구에게 오틸리아가 하는 말이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가비타뿐이야."

단지 영화를 보는 시청자인 내가 참담했다. 

 

 

 

 

엔딩. 식당에 내려와 있던 가비타가 말한다. 배가 너무 고파. 배가 너무 고파. 배가 너무 고파서.

 

 

보는 내내 나는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 내가 이 영화를 왜 봤나 후회할 정도였다. 극사실주의 영화였다. 두 젊은 아씨들과 동물 인간 한 남자, 셋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영상의 현실감은 보는 사람을 달달 떨게 했다.  최극단의 공포물이었다. 내 인생 최악의 해였던 2021년에 봤던, 공포와 심리극의 극한을 달리는 영화들조차 비교가 되지 없었다. 2021년 그해, 내가 봤던 영화들은 불한당들의 주전부리 정도에 불과했다. 

 

 

일부 영화 소개글을 읽어보니 구소련 및 동부 유럽 공산권의, 사회주의 쇠퇴기의 인간 생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라고 적혀 있다. 단지 구소련이나 사회주의의 쇠퇴기를 전제로 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이 영화는 인권이라는 어휘의 고상함을 들춰보면 드러날, 사람살이 여러 갈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동물이면서 더러움이 적나라한 인간 버러지와 점차 버러지가 되어가고 있는 기타 인간 짐승들 사이에서 신음하는 인간 군상들의 처참한 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더는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호소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 지휘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두드려봐도 먹히지 않은, 벌레 인간들을 향한 망치가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무섭고 또 무서웠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사람이 무서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섭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

이 시간은 가비타의 배 속에 어린 생명이 머문 시기였다. 

 

 

영화가 나를 공포의 구덕에 처넣은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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