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영화

<밀회> 리뷰 - 무모하고 유쾌해지는 기분을 맛보고 싶다

반응형

 

 

밀회 Brief Encounter 1949

 

 

대표 포스터. 영화 홈에서 가져옴

 

 

멜로/로맨스

영국 85분 개봉 1949.04.20.

평점 무려 9점대

 

데이비드 린 감독

셀리아 존슨, 트레버 하워드 주연.

 

1946년 제1회 칸영화제 그랑프리

제12회 뉴욕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둘은 간절하다. 영화 홈에서 가져옴

 

오랜만에 봤던 고전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며 '닥터 지바고', '콰이강의 다리', '인도로 가는 길'로 빛나는 감독의 영화이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나도, 가끔은 무모하고 유쾌해지는 기분을 맛보고 싶다? 아, 아니다. 귀찮다. 이런, 이 얼마나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인가. 나에게는 이런 유의 노선에 설 분위기를 안고 사는 사람이 지닌 향이 없다. 그러나~. 쓸쓸함을 달래줄 거울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이런, 달콤씁쓸한 영화를 봤다. 내 취향은 못 된다. 그럼 '헤어질 결심'은 뭐냐고? 달랐다. 이 영화는 그냥 진행되는데 '헤어질 결심'은 가슴에 칼날을 심고 달린다. 아마 시대 탓이리라.

 

영화 '밀회'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주부인 로라 제슨(Celia Johnson)이 말하는 문장이다. 어느 장면에서였는지는 저 아래에서 밝히기로.

'죄를 지을 때처럼 무모하고 유쾌해지는 기분으로 행했다.'

무모하다는 어떤 일을 헤아려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행동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무계획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점잖은 자유에서 일탈할 때 생성되는 '방종'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중산층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갖추고 사는 여자.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는 날과 시간이 정해져 있을 정도이다. 그녀에게 운명의 끈 한쪽 끝이 사뿐 내려앉는다. 그야말로 우연이다. 귀가를 위해 서 있던 길, 기차역에 서 있는 여자에게 바람이 들이닥쳤다. 비단 이 여자에게만 온 바람이 아닌데 바람은 그녀의 눈 속에 티끌로 화하여 숨어든다.

 

티끌은 있어야 할 곳이 사람의 눈 속이 아니다. 어서 제거해야 한다. 눈으로 보고 눈에 담아 떼어내야 하는데 눈 속에 숨어들다니. 방법이 없어 쩔쩔매는 아낙의 곁에 의사가 있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의사 알렉 하비(Trevor Howard). 존재가 운명을 안고 그녀의 안에 티끌 대신 들어와 앉는다. 호호 입으로 불어 티끌을 떼어낸 의사와 여주인공은 서로를 직시할 수 있는 눈 때문에 만났고 눈으로 서로를 찜한다. 운명의 신이 조종한 셈이라고 해 두자.

 

영화 속 여주인공이 남편의 생일에 맞춰 남편이 원하는 값비싼 생일 선물을 용기 있게 사면서 하는 말이 그랬다.

'죄를 지을 때처럼 무모하고 유쾌해지는 기분으로 행했다.'

이때는 건강하고 건전한 무모함이리라. 누군가 함께 감내할 수 있는 무책임, 분산되는 책임감이리라. 한편 달콤한 기분까지 동원할 수 있으리니. 설령 그 일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끈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 심지어 용기백배한 행동이었다며 칭찬까지 받을 수도 있는 한 방. 혹 그 일 이후 좋은 일만 벌어진다면 더더욱 당당해지기도 하고 대단한 치하를 받을 수도 있을 거사.

 

거사가 생뚱맞은 곳에서 불을 지피면서 태동한다. 사랑이다. 티끌 청소 이후 두 남녀는 대화의 탁자 앞에 앉게 되고 이미 각자 눈 속에 접수된 남녀는 다음을 기약하고. 기약한 날 불안과 양심을 내포한 미적지근한 늦음은 싹 터 오르는, 상대방에 대한 정의 양을 확대되게 하고, 마침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음에 발버둥 치는 운명의, 비련의 한 쌍으로 이끈다.

 

영화 홈에서 가져옴

 

 

둘은 사랑을 한다. 그냥 사랑이다. 책임이 더해지고 파괴가 정당화되고 자기 해체의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원형이라고들 말한다. 당사자인 박찬욱 감독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이 영화가 ‘헤어질 결심’의 순둥이 판!

 

우연? 그렇다면 운명이지 않을까. 아, 사랑은 결국 나의 바깥에서 조종하는 어떤 손이 있지 않을까 싶어지는,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움직이는 사랑. 그러므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죽을 쒔던지, 밥을 지었던지 그 둘은 행복한 색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현실을 파괴할까 하는 요동은 치지 않았는가. '불륜', '시시껄렁한 남녀 간의 윤간' 앞에서 멈출 수 있었던, 다시 피어날 준비 중이던 이성은 살고 있지 않았던가.  

 

상대방이 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데 내가 쉽게 거짓을 행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굉장히 쉽고 굉장히 비참하다. 사랑과 자존심과 품위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라는 뜻밖의 생각이 일어 아찔했다. 우리에게도 혹 '운명의 여신'이라는 자가 달려들면 그녀가 품고 있는 남근을 어찌할 것인가. 냅다 팽개쳐? 웃자고 한 말로 영화 리뷰를 마친다고 누구 나무랄 것인가. 어쨌든~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미로를 헤매는 기분으로 어리둥절 사방을 떠돌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 나를 처박히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 속에 빠져 길 잃은 미아의 신로 뻑뻑 무릎을 꿇어 길을 건너고 싶을 때가 있다. 도무지 헤어날 방법이 없을 듯싶은 광경 속에 자리하고 싶은 순간. 비록 참다운 여유는 부릴 수 없더라도 모두 다 내려놓고 땅바닥에 자화되고 싶을 때가 있다. 응당 내가 해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어리석다는 손가락질을 당하더라도 차라리 무모하고 유쾌해지는 기분 속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단 몇 분이라도. 사랑 타령만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