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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4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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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날(Sometimes In April)

 

영화 홈에서 가져옴. 대표 포스터.

 

미국

라울 펙 감독

2005년

드라마, 전쟁

출연

이드리스 엘바, 캐롤 카레메라, 파멜라 놈베트, 오리스 이휴에로, 프레이저 제임스, 애비 뮤키, 이비 카아가, 클레오파스 카바시타, 노아 엠머리히, 데브라 윙거, 제이 베네딕, 토드 보이스 ,

Stephen Buckingham, 로널드 퍼니, 브라이언 그린, 제프 하딩, 휴버트 콘드, 에이사 마이가, 마이크 마셜, 피터 맥로비, 톰 타미 등

다니엘 델럼 등이 제작에 참여

미술: 비노잇 바로우

의상: 폴레 맨게놋

배역: 실비 브로쉐레

배역: 에이비 코프먼

 

대부분 내전을 들여다보면 형제지간에도 편이 갈린다. 저주이다. 영화 홈에서 가져옴. 형 어거스틴과 동생 오노레

 

 

1994년의 르완다. 그해 4월 이후 진행된 집단 학살 사건. 영화 <4월의 어느 날>은 르완다 내전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이다. 얼마 전에 시청했던 영화 <트리 오브 피스 Trees of Peace >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 이후 벌어진 난장판을 그린 것. 영화 소개란에 출연 배우를 되도록 많이 적어보려고 애썼다. 이 지독한 역할들을 해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겨져서이다.

 

감독 라울 펙을 일찍이 현재의 아프리카 혼란을 낳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인류의 시작이라는 대륙 아프리카에서 현대에는 어쩌자고 수많은 차별과 불공정과 비참함의 일상이 진행되고 있는지 <야만의 역사Exterminate all the brutes>라는 다큐멘터리로 엮어낸 적도 있다. 그의 본격적인 아프리카 관련 영화이다. 감독의 태생이 곧 아프리카와 연결된다. 그의 출생지는 카리브해 주변 섬 국인 아이티다. 슬픈 아이티.

 

벨기에는 제국의 섬 머슴이었다. 유럽의 혼란 와중에 탄생한 이 나라는 엉겹결에 식민지를 부여받았다. 제풀에 그만 무너진 두 차례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 독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벨기에의 식민 국가 중 하나가 르완다였다. 벨기에는 꼭 영국이 하던 짓 그대로 모방했다. 집단 학살을 발생시킬 씨앗을 굳게 심은 것. 이름하여 인종 분할 정책. 이는 정치 세력들의 편싸움이 되게 했다. 고대부터 줄곧 아무 탈 없이 르완다 땅을 살던 후투족과 투치족을 편 가른 것이다. 듣기로는 후투족이 더 유럽인종 같았다던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나 몰라라 했다. 100일 동안 100만 명을 초과한 사망자 수라는 기록을 남긴 학살극.​​

 

<4월의 어느 날> 속 주인공 오거스틴은 투치인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사는 군인이다. 그는 후투인이다. 동생 오노레는 후투인을 대변하는 방송을 진행한다. 오거스틴의 상대파인 후투족 연합체의 군인. 동생 오노레를 비롯한 후투인은 벨기에 제국의 속국이던 시절 투치인의 저지른 행위를 벌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선다. 100일 동안 일백여 사람을 몰살시킨다. 그들은 이웃이었다. 이웃사촌으로 살던 이들이었다.

 

저런 상태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즐거움으로 생을 사나 싶을 만큼 나라 안은 온통 저주를 위한 판을 벌이고 준비하는 상태였다. 상대에 대한 저주를 실행하기 위한 군사훈련이 매일 반복된다. 대학살.

‘르완다인이 르완다인을 쳐 죽인 사건’

강대국들은 나 몰라라 한다. 역겹게도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판에 ‘감 놔라, 콩 놔라’를 할 필요가 뭐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 집안일이니 그 집안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일이 아니냐는 방식이었다. 독일이니 벨기에는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만이 겨우 거죽을 열고 들여다봤을 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죽고 죽인다. 패 죽이고 쳐 죽이고 짓밟고 짓이기고 칼질과 총질과 강간 질이 반복될 뿐이다.

‘저게 인간일까.’

‘저것들이 어찌 생명체일까.’

영화 시청 내내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싫었다. 이토록 잔인한 행위를 어린이들의 놀이처럼 진행하는 르완다인들을 보면서 인간이, 사람이 징그러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끔찍해졌다. 야만의 인류 역사, 광기의 인간 놀이는 철학 속 연구 주제가 아니었다. 끔찍한 현실이었단다. 그만 내 삶이 싫어졌다. 인간으로 사는 현재의 내가 얼마나 지저분하게 느껴지는지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이 영화를 괜히 본 것이 아닌지 몇 번을 머뭇거렸다. 그만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 그네들은 얼마나 삶이 힘들었을까.

 

후투족은 끊임없이 '바퀴벌레'라며 상대 투치족을 쫓는다. 어린이나 학생 등 투치족 노약자들을 한칼에 베어버리는 후투족. 마치 놀이처럼 한 곳에 몰아넣은 투치족 여자들을 차례를 바꿔가면서 강간하는 남자들. 그것들을, 그 동물들을, 그 짓을 하면서 웃어대는 그 짐승들을 고발하기 위해 국제재판의 증인대에 선 투치족 한 여인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모른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인간사에는 당연히 이러한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르완다에서의 이 집단 학살극 이후에도 끊임없이 진행되는 내전이며 전쟁, 분쟁을 접하고 있다. 인류사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대 환장을 이루고 산다는 현대 시대에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던 본능의 고대와 어리숙한 야합의 중세 및 근대의 모습들이 재현되고 있는데도 인류사는 반성이 없다. 르완다 내전 같은 것은 아프리카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동남아며 남아메리카 등 빈곤국에서 유독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 원초적인 혐오와 분열과 분노와 증오가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한다. 극단을 달린다. 차마 인간계의 일이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약자와 여자들을 짐승 짓밟듯 으깨어버리는 인간들에게는 특별법이 필요하다. 자식들을 위해 용감하게 방향 전환하여 차를 몰아가던 오거스틴의 아내. 그녀가 당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눈앞에서 상대가 쏜 총알에 쓰러지고 마는 두 아들을 두고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그녀는 차라리 입고 싶었을 거다. 그녀는 죽었다.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매일 강간으로 짓이겨져 버린 몸뚱이를 자폭으로 마감한 그녀가 차라리 잘했노라고 판단을 내리는 내가 얼마나 처참한지 모른다.

 

이런 상태로, 이대로, 살아가야 할까. 이런 유의 생을 아무런 저항 없이 이대로 진행하게 한다면 그것은 인류 공동의 죄악이 아닐까.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최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적으로는 전 인류사를 아우를 만큼 최극단의 삶을 일궈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소리를 내고 글을 쓰고 저항의 몸짓을 하는 등 온 지구적인 연대의 힘을 내뿜어야 하지 않을까. 혐오와 배제와 농간과 지저분한 권력의 횡포가 더는 지구에 존재하게 하면 안 된다. 당시 르완다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밀 콜린스 호텔'같은 장소 및 그곳에 실재하던 사람들이 더더욱 필요하다. 신뢰가 꽉 찬 사회가 존재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긍정적인 얽힘의 관계가 필요하다. 인종이며 종족, 종교, 문화, 영토 등을 내걸어 상대를 치는 지저분한 인간들을 퇴치해야 한다.

 

2014년의 탄자니아 아루샤. 국제 형사재판이 진행되는 현장을 장식하는 미국 등 강대국의 인간들이 정말 미웠다. 그 알량한 최소한의 개입으로 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현실을 반성하는 듯한 대사는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것일까. 이에 대한 감독의 진솔한 적나라한 생각의 고백을 받고 싶었다. 제국을 산 강대국들이여, 무릎을 좀 꿇어봐라. 흉내라도 좀 내보아라. 르완다여, 어서 당당하게 일어서기를. 대단결의 르완다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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