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영화

거북이도 난다

반응형

 

 

 

 

 

 

거북아, 부디 날아오르렴. 

 

거북이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각 나라는 각기 자기들의 경제와 맞물려 이익을 낳는 곳이 아니라면 결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어젯밤 이란과 이라크의 위쪽에 사는 쿠르드족의 삶을 다룬 영화를 봤다. 비교적 짧은 상영 시간이어서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영화 보기를 시작했다. 나를 덮치는 분노의 밀도가 너무 강했다. 쉽게 영화를 마칠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난 후 한참 동안 텔레비전 자막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서남아시아 한쪽이라고 해도 될까. 이라크 쪽에 사는 쿠르드족의 이야기이다. 끊임없는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영화 속 무대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게 질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소식을 듣고 모인 쿠르드족이 모인 곳이다. 심장이 뛰어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가련한 아이들. 요즈음 더더욱 잊히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이 길어지면서 어쩌다가 한 번씩 인터넷 귀퉁이에 가느다란 제목으로 출몰했다가 사라진다. 쿠르드족!

 

 

그놈의 석유가 문제였다. 영국이 다시 서남아시아에서 머무르려던 이유는 곧 자원이었다. 1.2차 세계대전의 역사 속에서 제국주의라는 귀신놀이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정치와 경제가 함께 가면서 찌그러져 가는, 너무 배불리 먹어 더 이상 배부른 왕 노릇도 힘든 유럽의 강대국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만 쿠르드족 주거지 땅 밑 곳곳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말았다. 해가 지지 않을 정도의 식민지를 부리던 영국은 그것이 마지막 돈벌이라고 여겼을까. 같은 나라에서 함께 살아오던 친구들마저 소수민족이라며 터부시 당하는 쿠르드족을 영국은 싹둑싹둑 대 가위질을 하여 갈라놓았다. 땅도 갈랐다. 쿠르드족은 제 나라를 갖지 못한 채 여러 나라에 나뉘어서 울부짖고 있다. 

 

 

언젠가 어느 인터넷 플랫폼에서 쿠르드족 관련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너무 가슴 아팠다. 사건의 발생은 인중에 수염 더부룩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집권기였다. 이십만 가까운 쿠르드족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피의 일요일'이라는 문구가 함께 있었다. 현대라는 사회, 자본이라는 사회가 그들에게는 재앙이다.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오고 가는 대화들이 들린다. 영화는 어느 작은 소녀가 신발을 벗어놓고 저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시작된다. 소녀는 늘 자기 등에 맹인 꼬마 아이를 업고 다녔다. 소녀 곁에는 두 팔을 분실한 소년이 있다. 오빠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던 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가 두 팔이 잘렸다고 했던 것 같다. 이 가족 셋은 다른 쿠르드족 마을에서 이주해 왔다.

 

 

소년 보스가 등장한다. '위성'이다. 위성방송 안테나를 설치하는 데에 온갖 노력을 다하는 '위성'이다. 사담 후세인을 피해 모여든 민족에게 전쟁 정보를 볼 수 있는 위성방송이 필요했다. '위성'은 한껏 꾸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혼돈의 와중에서 마을을 진두지휘하는 대장이다. 아이들 무리를 이끌면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내겠다는 집념이 위대하다. '위성' 앞에서는 소년들 모두가 한마음이다.

 

 

소년 보스 '위성'은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진정 무리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융통하는 일거리들로 소년들의 생계가 유지된다. 그는 요즈음 여러 국가 기관들이 어설프게 해내는 일자리 창출을 비웃을 정도로 야무지고 건실하고 용기 있다. 보스는 어른들도 이끈다. 아쉬운 것은 앞날을 예측하는 힘을 지니지 못한 것이다. 소년 보스는 아이 '리가'를 등에 업고서 두 팔 없는 오빠 '헹고'를 건사하는 소녀 '아그린'을 좋아한다.

 

 

 

두 팔이 없는 소녀의 오빠 '헹고'는 예언가이다. 잠 속에서 사람들의 미래를 본다. 오늘내일 그리고 모레,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알 수 있다. 결코 공동체의 세상 위에 나서지 않는 이 불구 소년은 맹인 꼬마와 맹인 꼬마를 등에 업은 소녀를 지키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사실, 이 오빠만 두 팔 불구인 것이 아니다. 소년 보스를 따르는 소년들 무리 속에는 한 팔 불구, 한 다리 불구 혹은 두 다리 불구 등 전쟁으로 인한 장애인이 정상인보다 더 많다. 그들은 장애 보조도구마저 불량품들에 의지하여 생을 연명하고 있다. 달리고 있다. 그래, 거북이도 난다.

 

 

이라크 땅이면서 조금만 더 가면 터키 땅인 곳이 무대이다. 지역 이름을 잊었다. 어쨌든 다른 여러 국가에 걸쳐 사는 쿠르드족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 자기들의 성을 고집하며 자주독립을 원한다. 저항으로 인해 늘 주변 국가들로부터 구박을 받아왔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주의의 쑥대밭 속에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전쟁터 속 원시생활보다 더한 참상을 사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들에게는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 가까스로 몸을 누일 수 있는 천막에 들어가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아침을 맞는다.

 

 

소녀의 등을 늘 차지한 채 살아가는 꼬마 맹인은 소녀보다 두 팔이 없는 소년에게 더 매달린다. 두 팔이 없는 소년은 두 팔이 없는데도 영락없이 맹인 꼬마를 목에 걸쳐 안고 살아간다. 잠자리에서 소녀는 맹인 꼬마가 자기 가까이 자는 것을 거부한다. 왜일까.

 

 

맹인 꼬마는 소녀의 자식이었다. 아직 열서너 살 혹은 열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낳은 맹인 꼬마는 누구의 아이일까. 부디 그 아비에게 벼락이 치기를 기도했다. 소녀는 맹인 꼬마를 증오한다. 늘 두 팔 없는 오빠를 조른다. 어서 이곳을 떠나자고. 살 만한 곳으로 떠나자고 재촉한다. 덧붙인다. 맹인 꼬마를 버리자고. 소녀는 실제로 서너 번 맹인 꼬마를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큰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린다. 소녀는 신발을 벗어놓고 저 아래 바다로 뛰어든다. 두 팔 없는, 맹인 꼬마의 삼촌 '헹거'가 잠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달려와 통곡한다. 맹인 꼬마는 소녀의 자식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자기 뱃속에서 열 달을 살았던 아들이었다.

 

 

끝없는 자주독립 투쟁을 부르짖는 쿠르드족. 내전까지 더해져서 바람 잘 날 없는 땅인 듯싶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기,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의 땅 한쪽 귀퉁이를 빙 둘러 쿠르드족이 산다고 한다. 그들은 소수민족이다. 옛날 옛적 그저 한 집안이 같은 곳에 두리뭉실 모여 살았을 것이다. 오손도손 함께 살았으리라. 우리나라 옛 시절 자자일촌 한 마을에 모여 살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 여섯 나라에 어느 한쪽 발의 새끼발가락만 걸친 채 매달린 있는 것처럼 가까스로 사는 신세이다.

 

 

둥글게 온순한, 동그라미 모양의 땅을 살고 있던 그들에게 강대국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이웃사촌을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어 살게 했다. 쿠르드족은 끊임없이 자기 민족이 치고 살았던 울타리를 복원하겠노라고 일어서고 있다. 오직 한 나라, 정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살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그러나 요원하다.

 

 

쿠르드족 출신의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작품이다. 그는 꾸준히 자기 민족의 실상을 그대로 알리기 위해 영화를 찍는다. 그의 영화 스승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서남아시아적인 감성을 그는 거부한다. 도무지 인간일 수 없는 세상을 사는 쿠르드족 아이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