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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개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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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하다

 

이렇게 편한 잠 자고 나면 개안하리라.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끝이 없다. 살아보니 주부가 하는 집안 살림이라는 것, 그것은 해도해도 끝이 없더라. 어쩌다 휴가. 맘 먹고 엎치락뒤치락 집안 살림을 좀 떠들어보려고 하면 하매 이놈의 일이 언제나 끝날까 싶더라. 시작이 반이 아니더라. 시작이 시작이 아니더라. 끝이 아예 보이지가 않더라. 처음과 끝, 그 경계선이 안 보이더라. 선이라는 것이 상식에 의하면 실선이 있고 점선이 있어 선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저것도 그 아무러한 선의 종류가 형성되지 않더라.

 

우리 엄마 살림 살았던 것에 비하면 나의 살림살이는 속된 말로 째비도 안 된다. 그녀, 우리 엄마 살림 살았던 것에 비하면 내가 하는 살림살이는 소꿉놀이 정도. 그 큰 살림을 사는데 우리 엄마 산더미같은 일을 다 마치고 나면 늘 하던 말씀이 있었으니 '개안-하다'이다.

 

개안하다. 개안-하다는 두번째 글자 '안'을 길게 늘이빼어 발음한다. 소리나는 대로 써보자면 '개아아안하다' 정도. 

"아이고. 끝났다야, 끝났어. 나, 오늘 할 일은 인제 다아 끝났다야. 개아아안하다."

온갖 감정 다 담아 내뱉으면서 우리 엄마는 안방 한쪽 바닥에 규칙도 법칙도 없이 몸을 쭉 눕히고는 단 몇 초도 되지 않아 눈을 감으셨다. 꿈같은 잠으로 들어가셨다.

 

 

이렇게 잘  끓인 매운탕을 먹고 나면 또 속이 개안하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사전 속 '개안하다 1'은 '開眼하다'의 한자어가 얹혀져있다. 활용형으로 개안하여, 개안해, 개안하니로 펼쳐진다. '개안하다 1'은 동사이다. 눈을 뜨는 것을 말한다. 물리적인 눈 뜸을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지닐 어떤 정신적인 기운을 얻게 될 때 '개안하다'를 접붙여 말한다. 이는 곧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새삼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불교에서는 불교 불상을 만든 후 처음으로 공양하는 것으로 불상에 영(靈)이 있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물리적 요소의 '개안하다'는 한자어  '開眼하다'로 바로 이어진다. 이는 맹인이 의학 각막 이식 따위를 통하여 시력(視力)을 되찾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 엄마가 고된 하루 노동 끝에 혼잣말처럼 내놓았던 '개안하다'는 그렇다면 어떤 뜻일까. '개안하다 2'에 해당되겠다?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가뜬하다는 의미. 무겁게 안고 있던 어떤 일이나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혹은 끝이 나서 마음이며 몸이 가뿐해지는 경우. 우리 엄마의 '개안하다'이다. 살짝 변형된 다른 말로는 '개운하다'고 하기도 한다? 아니더라. 사전에 의하면 '개안하다'가 '개운하다'의 '방언'이다. 

 

그러므로 '개안하다'는 '개안하다 2'의 뜻으로 표기될 것이 아니다. 동사가 아니다. 형용사이다.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가뜬하다는 것을 말한다. 음식의 맛이 산뜻하고 시원할 때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바람 따위가 깨끗하고 맑은 느낌이 있어 상쾌하다는 뜻도 함유한다. 그 예로 쓸 수 있는 문장을 적어본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안하다.'

'진하게 끓인 육수를 넣어 맵게 끓인 매운탕 한 그릇을 먹었더니 속이 개안하다.'

'이번 시험 준비하느라 잔뜩 긴장했는데  끝나고 나니 개안하다.'

 

시험 끝. 개안하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우리 엄마의 개안하다는 위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해야 할까. 물론 위 셋의 의미 모두 크고 작게 연결되는 뜻이다. 개안하다. 그래, 내가 하는 만사는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다 하고 간 일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가느다란 새의 발에 난 상처에서 나오는 아주 적은 양의 피를 말한다. 아주 적은 일을 말할 때 사용하는 관용구이다. 나는 우리 엄마의 폭넓고 깊이 있는 관용의 우산 아래 보호받는 삶을 산다. 아주 적은 부피의 생을 산다. 그것도 가까스로 살아내고 있다. 반성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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