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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내 어머니의 언어

골병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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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병-들다. 골病들다.

 

 

탄광.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우리나라가 아닌 듯!

 

골병들어 [골병드러].

골병드니 [골병드니].

골병드오 [골병 드오].

이제 그만하시오. 그것으로 됐소.

 

그 사람은 서둘러 저 세상으로 갔다.

 

어릴 적 우리집에는 세 사람의 일꾼이 늘 있었다. 상일꾼, 중일꾼, 애기일꾼. 그중 내 뇌리에 온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상일꾼.

'우와, 굉장히 잘 사는 집이었구나."

천만에요. 아닙니다. 아니고 말고요. 옛 농촌은 지금 보통의 농부들처럼, 부농이라 해도 통계학적으로 전국 단위 중 정도의 삶을 살 뿐.

 

'골병든다'는 심하게 다치거나 무리한 노동 따위로 몸이 상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속으로 깊이 병이 든다의 뜻을 지녔다. 예를 들어

"갑돌이네 아버지는 하루 열 시간이 넘는 막노동으로 온몸이 어느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을 만큼 골병들었다."

를 말할 수 있다.

'골'은 '뼈 골'과는 구분되지 않을까. 골은 뼈의 중심부인 골수 공간(骨髓空間)에 가득 차 있는 물질을 말한다. 붉은 기운의 액과 하얀 기의 액, 황색 수가 있어 적혈구와 백혈구를 만들고, 황색수는 양분의 저장을 맡는다. 일반적으로 중추 신경 계통 가운데 머리뼈안에 있는 부분을 말하기도 한다. 대뇌, 사이뇌, 소뇌, 중간뇌, 다리뇌, 숨뇌로 나뉘면서 근육의 운동을 조절하고 감각을 인식하며, 말하고 기억하며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중추가 있는 대부분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골’이다. '골'이 고유어인지 한자어의 음을 옮겨 한 낱말로 사용하는지는 더 조사해 봐야겠다.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고유어 '골'과 질병 병(病)의 합성어이다.

 

오픈 탄광이란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남도에서 하던 식으로는 '골벵들다', '골빙들다', '얼병들다' 등이 있다. 나는 이 낱말들을 모두 들으면서 자랐다. 가만 보면 우리나라 언어는 서울과 경기 북부, 제주를 뺀 나머지 공간의 언어로 구분할 수 있겠다고 여겨진다. 나머지 공간에서 사용된 사투리들이 거의 함께 쓰였음을 늘 느낀다. 

 

어릴 적 대도시로 유학을 온 우리 형제 자매의 밥을 해주시던 할머니가 늘 말씀하셨다.

"어메아베 늬들 키우니라고 골병들겄다."

다행히 할머니는 혼잣말로 하셨지 우리에게 잔소리가 되게 하지 않으셨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왜? 만약 할머니가 늘, 잔소리로 하셨다면 사춘기의 우리 형제자매는 올바르게 자라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른들의 잔소리가 어린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여럿 봤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맞다. 우리 엄마는 우리를 키우느라 골병들었다. 한데 그녀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사용했다. 특히 우리 집 상일꾼이셨던 ◯◯아재에게 말하셨다.

"아재아재, 좀 쉬었다가 하지 그라요. 그러다가 골병 드요이. 점심 먹으면 한숨 자고 일 나라고 저녁 먹으면 소 밥 주는 것은 다른 사람 시키고 그러랑게요.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쌋소."

"걱정 마쇼. 지 몸 지가 잘 알고 있어요. 암상토 안하니께 하지요."

 

그는 우리  집안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등치부터 믿음직스러웠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가 밤낮없이 읍내로 나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재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세월은 하 수상하게 진행되고 어느 날 ◯◯아재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님, 가야 쓰겄소야. 거, 거기 말이오."

"어디를 말하냐. 니 마누라가 그러던?"

"지 마누라도 그러지만 지 생각도 그리 맘이 돌아섰소야."

나는 덕지덕지 두꺼운 화장으로 예쁜 얼굴이 참 아쉬웠던 그이의 마누라를 떠올렸다.

"왜? 돈 많이 번다고 해서?"

"야. 그리 돈을 많이 준다는디 그게 낫지 않겄소야. 저도 성님처럼 좀 잘 살아보고 싶기도 하지라우."

"돈 많이 주는 것은 이유가 있어야. 목숨을 담보로 잡고 일을 시키는디 그 돈 안 주고 어찌 사람을 사 쓰겄냐. 니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으나 니 마누라 생각이라면 쫌 더 생각을 해봐라. 새끼들이 저리 어린디 어찌 목숨 내놓고 일을 한다고 그러냐."

"예. 알겄소야.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겄소야."

 

 

탄광 관련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그가 생각난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그는 다시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러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집을 떠났다고 했고 한 달쯤 지나 식구들도 그곳으로 모두 이사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큰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간 곳은 탄광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났을까. 아버지는 그의 시신을 묻기 위해 명당을 잡아준다는 이웃 마을 어른을 데리고 왔다. 아버지는 그에게 연신 말했다.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가요. 지 몸 좀 사리지. 돈이 뭐라고. 저 세상에서라도 편하라고 묘 터 좀 잘 잡아주시오."

"으째 그 양반이 이리 갑자기 가부렀다요? 건강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디."

"그래, 뭔 큰돈을 번다고 갈 것이오. 뭘라고 갈 것이오. 딱 때맞춰서 무너져불었다오."

종일 아버지는 눈물을 훔치면서 문중 산 이곳저곳을 돌아보러 다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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