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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창작

눈부시게 하얀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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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빛이 너무 밝아서 그만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해주신 것은 이보다 더 예쁘고 맛있는 얼음 수박꽃이었다.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종례 시간이 길어져 담임 선생님이 미웠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말이 많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예."

"어이쿠나. 모두 재미가 하늘만큼 대단했구나. 잘했어요. 내일은 하늘 두 배만큼 더 재미있게 생활하기로 해요. 알겠지요?"

'흥, 얼른 끝내주시지. 왜 저렇게 말이 많담? 분명 오늘 조금 전 점심시간에 나 오늘 집에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저러신담? 일부러? 그럼 나는 안 좋아하시는 것일까?'

 

아침 등교 시간에는 이 세상 최고의 '우리 선생님'이셨다. 

"우리 찌. 학교에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엄마하고 같이 나왔어요?"

"아니요. 엄마는 6학년이어서 더 빨리 가야 하신대요. 아빠는 더 일찍 출근하셨고요. 저 혼자 문 잘 잠그고 문이 누나하고 같이 왔어요."

"어이쿠나. 우리 찌, 대단해요. 최고예요, 최고. 입학식에도 혼자 왔지요? 초등학교 입학식에 혼자서 입학식을 치른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 찌 말고는 없을 거예요. 대단해요, 우리 찌."

 

"선생님, 오늘은 종례 없이 바로 집에 가면 안 되나요?"

"왜?"

"오늘은 집에 꼭 빨리 가야 하거든요.?

"그래? 그런데 왜?"

"있어요. 그게~."

"그게 뭐냐고 찌야아."

"그럴 일이 있다고요."

점심시간에 찌는 일부러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다. 보통 점심시간에는 선생님과 뚝 떨어져서 앉는다. 무슨 일인지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먹는 데에 흥미가 없는 찌다. 오늘은 꼭 선생님께 은밀하게 드릴 말씀이 있었다. 

 

찌는 더는 선생님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오늘 집에 가야 할 일이 별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외할머니가 집에 오실 수 있다.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기 때문에 집에 빨리 가야겠다고 주장하면 주장하는 글쓰기를 아주 열심히 가르치는 우리 선생님은 그 주장은 틀린 주장이라고 또박또박 말씀하실 것이 빤하다. 옆집 사는 문이 누나가 그랬다. 3월 2일 개학식 날에 찌는 문이 누나의 손을 잡고 입학식을 하러 갔다.

 

찌 엄마는 선생님이시다. 회사 일로 바쁘신, 밤에만 들어오시는 아빠가 찌의 입학식에 오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엄마까지 입학식에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 찌는 너무 속상했다.

"찌야, 엄마는 선생님이잖아. 엄마는 오늘 학교에 가서 엄마가 오래 새로 맡아서 가르칠 언니, 오빠들을 만나야 해. 올해 처음 만나는 날인데 담임 선생님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 담임 선생님은 일 년 동안 반 아이들 곁에서 함께 살면서 보호해 주고 보살펴줘야 한단다. 더군다나 오늘은 첫날이야. 담임 선생님이 안 계신다면 어떻게 되겠어? 오늘 찌 곁에 엄마가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이제 알겠지? 대신 앞집 문이 누나가 너를 잘 데리고 갈 거야. 올 때는 너 혼자 올 수 있잖아. 유치원 때도 혼자서 잘다녔으니까 이제 초등학생인 우리 아드님. 혼자서 집에 오는 것이야, 꿀꺽꿀꺽 물 마시듯 쉬운 일이겠지요? 내 사랑 파이팅, 파이팅, 홧팅, 팅팅팅팅팅팅!"

 

찌는 이제 1학년을 반년 가까이 다녔다. 학교가 끝나고 터덜터덜 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학원도 다니지 않는 찌는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야 한다.

"오늘은 혼자 가서 뭘 한담? 유치원 선생님에게 놀러 갈까? 아냐. 선생님도 이제는 내가 귀찮을 거야. 며칠 전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선생님이 그러셨어. 유치원에 와도 찌 혼자 놀 수 있지? 선생님은 이제 찌보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바쁠 거라고. 참 내, 나는 누구랑 놀지?."

어제까지도 가끔씩 했던 생각이었다.

 

댓돌 위에 놓인 저 고무신보다 몇백 배는 더 하얗게 빛나선 여성용 고무신.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오늘은 다르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리 꼭대기 위에 갓 구운 고구마를 올려놓은 듯 찌는 듯이 더운 여름이다. 불볕더위 속을 쌩쌩 달렸다. 로켓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봤다. 어떤 사람은 무척 걱정이 되는 눈빛으로 한참 찌의 뒤통수를 따라 함께 달려왔다.

'띠띠띠띠'

네 번의 손가락 운동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눈에 익숙한, 그러나 오늘 아침까지는 없었던 하얀 물건이 현관에 놓여 있었다. 흰 고무신 하얀빛이 너무 밝아서 찌는 그만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정수리 가득 찐 땀을 흘리면서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선 찌는 바닥을 박박 기어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분명 그곳에 계실 것이다. 손주를 위해 얼음 수박꽃을 만들고 계실 적이다. 찌의 최고의 이야기 동무이신 외할머니가 오시는 날이었다. 

"할무니, 할무니, 할무니이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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