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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영화

레즈 R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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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 RED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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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비티 감독

워렌 비티, 다이안 키튼, 잭 니콜슨 등 출연

 

드라마 미국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200분

 

수상 내역

1983 36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1982 34회 미국 작가 조합상(각본상)

5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여우조연상, 감독상, 촬영상)

34회 미국 감독 조합상(감독상(영화 부문))

39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감독상)

7회 LA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여우조연상, 촬영상)

16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여우조연상)

1981 46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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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세 시간 십삼 분을 넘게 방영했다. 초입에서 영화 보기를 멈출까 했다가 오랜만에 진지한 버전의 영화를 보는 것이 어스름 속에 사그라져가는 내 뇌에 필요하다 싶어 보기로 했다. 내 심장에 긴장감을 심어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멈추지 않았다. 

 

영화 제목 그대로 붉은 세계, 공산주의가 바탕을 흐른다. 실제 인물의 삶을 그린 영화. 워렌 비티가 감독과 주연을 함께 하는 영화라서 더욱 관심이 갔다. 연기라면 빼놓을 수 없는 다이안 키튼과 잭 니콜슨이라니. 장시간의 영화인데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단 한 장면에서도 하지 않았다. 명화였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는 상식적인 명화에 대한 대사를 읊으면서 리뷰를 시작한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인류 역사의 흐름상 있을 수밖에 없는 이념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사상이랄 수 있으나 가만 역사의 면면을 되돌아보면 당대에는 틀림없는 진지한 사고에서 출발한다. 인류 역사의 시작 이래 물리적인 힘의 지배 아래에서 헤맬 수밖에 없던 시대도 꽤 길었다.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할 때이므로 당연하다. 생각의 발전, 사고 범위의 확장 등 지적인 궤를 다지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응당 물리적인 힘의 범위 안에 인간은 생명 유지가 가능했을 것이다. 

 

언어가 발전하고 공유 언어가 혈연 속에서 구조화되고 그 언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문자가 발명된 후에야 마침내 육과 혼, 물리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의 평형 유지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런 흐름 위에 종교가 세상을 아우르는 중세를 지나 본격적인 영육 공존의 근세, 현대로 진출한 것이리라. 

 

근세가 민족주의며 산업혁명이니 식민지주의의 혼돈 속 병행이라는 다리를 건너 현대로 옮아오면서 공산주의 즉 사회주의는 힘의 평등을 위한 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이리라. 결국 권력 나눔이라는 필요 불가결한 현대를 위한 장이 들어서면서 근세는 그 한 가지 방법으로 공동 분배라는 거창한 문구를 앞세운 마르크시즘이라는 장이 펼쳐졌으리라. 이는 소련에서 레닌주의로 구체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를 지배하는 한 축으로 굳게 세워진 것이다. 

 

구체적인 문구 등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서 번역본을 읽었다. 그 이전에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도 역시 읽은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본주의를 읽을 수 있다는 소문을 나도 확인했다. 경제론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일상사 그 면면을 '자본론'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현대를 사는, 철없는 인간류에 속해있는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당대, 영화 속 1900년도 초입의 현대인은 다양한 관점에서 마르크시즘이 발휘하는 휘황찬란한 이론의 틀에 안주하고픈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존 리드를 비롯한 급진 공산주의자들의 피는 더 붉을까.

 

 

영화 '레즈'의 주인공도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그 이론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공산주의자의 출발은 순수 그 자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바라본 인간사는 마르크시즘을 읽고 보니 살아서는 안 될 세상이었으리라. 존재해서는 안 될 이념이 '자본주의'였으리라. '사유재산제도'였으리라. 지금껏 모든 권력의 근거지는 사유재산이었으니까. 

 

사회는 점점 현대로 나아가고 채 제국주의 시대를 덜 벗어난 상태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앞뒤 볼 것 없는 꽉 막힌 이념전쟁으로 길을 달린다. 그 길은 험난한 협곡이었다.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려면 더욱 각자 자기 돌아보기를 먼저 해야 했다. 양극 위치한 두 그룹 모두 상대방의 심장 찌르기에만 열중이었다. 그런데다가 양극 모두 자기네들의 무리 안에서 파벌싸움이 또 극으로 치닫는다. 눈앞의 자기 권력에만 열중인 상태로 고개를 처박은 군집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를 짓밟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곧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다.

 

그곳에 이 영화의 주인공이 서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선 상 위에 미국의 급진 공산주의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존 리드가 서 있다. 그의 실제 삶을 끌어온 영화였다. 존 리드 역의 웨렌 비티의 연기는 여주인공, 시인 브리안 역을 맡은 다이안 키튼의 연기와 함께 대단하다. 존 리드와 브리안은 사랑하되 각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동거에 들어간다. 공산주의식 사랑일까? 아님 각자의 생을 철저하게 각각 살되 몸은 하나의 삶을 꾸린다는 것이었을까. 여성 인권을 위한 삶을 꾸리는 것도 같은 브리안의 여권 신장을 위한 삶의 방법일까.

 

저널리스트이자 진정한 공산주의자의 삶을 사느라 바쁜 존 리드가 만든 빈틈을 브리안은 극작가이자 존 리드의 절친인 유진 오닐(Eugene O'Neill: 잭 니콜슨 분)과의 불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자유 연애의 삶은 결코 아닌 듯하지만 어쨌든. 그러고 보면 인류 역사에서 남녀 관계란 지식 혹은 각자 내건 어떤 이념에도 불구하고 항상 각자 맘대로이다. 옛날에도 지금도. 말하자면 정갈한 남녀관계란 찾기가 힘들더란 것이다. 그러나 브리안은 마치 훗날 영화를 위해 미리 짐작하고 살아낸 삶처럼 영화 속에서 순정을 찾아 길을 나서니. 각설하고 또 어쨌든~

 

급진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 존 리드는 저널리스트에서 더 나아가 소련 공산주의의 실체를 경험하고 파악하고자 미국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하여 러시아로 간다. 브리안도 존 리드를 다시 굳건해진 사랑을 위해 러시아 땅에 발이 묶인 존 리드를 찾아 러시아로 향한다. 러시아는, 마르크시즘이니 볼셰비즘은 현실을 무시한 채 독단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진정한 혁명이 아니었다. 민은 없고 힘만 있었다. 백성을 굶어 죽어가는데 책상머리 앞에서 편을 나누어 힘 뺏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혁명의 혼란 속에, 모든 가치관은 무너져가는 상황 속에서도 존 리드는 외친다.

"지금 포기하면 인생 전부가 무너져.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어야만 돼."

그는 과연 진정한 혁명을 위해 버티는 것이었을까. 혹 한번 내뱉은 자기주장이 샅샅이 무너지는 현장은 곧 자기 생의 실패라고 여겨져서 힘 찾기 놀이판을 끝내 벗어나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껏 해 온 노력이 무너지는 허망한 꼴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어서였을까.

 

연인 브리안을 비롯하여 존 리드의 주변을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사이사이 등장한다. 그들은 말한다. 당시 미국을 뒤흔들기도 했던 사회주의자 중의 상당수는 이상주의자였다고. 목구멍이 포도청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며 공산주의를 알지도 못했다고. 그의 급진적 공산주의자의 생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그가 자기 생을 걸었던 그 길은 어쩌면 영화로 제작되기 이전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번 미국, 연인 브리안과의 크리스마스 이전 귀국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맹목적인 경도에 의하여 짓밟힌다. 결국 '인터내셔널'이라는 공산주의가 내세운 집단에 의해 자기 생을 바쳐야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을 홍보하는 자리 이곳저곳에 끌려다니다가 어렵사리 러시아를 찾은 브리안과 재회하기는 하지만 러시아의 작은 병원, 의약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상에서 생을 마감한다.

 

마르크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볼셰비즘의 허와 실, 흥과 망을 모두 읽을 수 있는 영화였다. 세 시간 넘는 영화 상영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다. 어떤 일이든지 맹목적인 방향으로 추가 기울면 쇠한다. 그 방향에 무리가 지어지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오직 한 길만 걸어간다. 일체 옆을 보지 않는다. 당연히 뒤를 돌볼 여유가 없다. 옆과 뒤에는 그들의 힘이 분배되어야 할 보통의 사람들이 조심스레 길을 걷고 있다.

 

고래로 정치판이 그렇다. 한 길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이들이 정치판에는 허다하다. 상식 이하의 짓을 그들은 거침없이 한다. 그들은 상식이며 기본이며 바탕이라는 것을 뭉개고 간다. 그들이 가진 이념과 사상은 마의 세계가 되고 눈앞에서 이어 진행될 자기 파멸의 현장이 빤히 드러나는 데도 불구하고 당당한 척 나아간다.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멸시하면서 마의 구렁텅이로 자빠진다.

 

존 리드는 그래도 괜찮은 인물이다. 그는 백성을 무시한 채 자기 권력에 취하려는 이들을 나무라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나 이를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소련 공산주의가 만들어 놓은 마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자기 무덤  파기라는 것을 어서 판단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일종의 지나친 자기 고집이다. 결국 남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배려하지 못한 이기주의에서 배태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적절한 선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 곧 그가 생을 망가뜨린 이유이다. 중용이 필요했다. 무조건적 합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를 함께 안고 나아가야 한다. 이를 무시할 때 자기기만에 빠진 채 고립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거만함을 버리지 못한 채 득세를 위한 함정에 스스로 묶은 것이다. 결국 불필요한 논쟁 끝에 편싸움만 진행하다가 몰락하고 만다. 이에 물린 백성들은 피고름을 고인 생을 살아야 한다. 

 

REDS. 붉은 색깔을 내세운 무리들을 일컫는다. 영화 제목을 이렇게 내건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거의 사멸했다고 여겨지는 공산주의 붉은 물결을 존 리드의 패한 생으로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나라에서 불리는 낱말 '빨갱이'가 떠오른다. 그들도 안쓰러운 삶의 주인공들이다. 마르크시즘, 볼셰비즘 그리고 소련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의 거대함에 너무 짓눌린 채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 길을 아직 알지 못했던, 미리 가려던 이들의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도 사실은 그에 버금가는 스토리들을 안고 있다. 이를 또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명화 축에 이 영화를 위치시킨다. 인터내셔널, 소련 공산주의의 틀 안에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연설하고 바로잡아보려고 노력하는 존 리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노력했다. 제대로 된, 마르크스의 이론 '자본론' 속 사회 구축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고 본다. 크렘린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둔 그의 생에는 다행히 브리안이 있었다. 어쨌든 지구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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