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1 - 1회
눈을 뜰 때마다 반복되는 생각이 있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매일 아침 불쑥 솟아오른다. 오늘. 오늘이 언제인가. 오늘을 확인하는 것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몇 년을 살았을까. 몇 살을 숨 쉬었을까. 가지런히 함께 떠오르는 생각을 마무리하기 위해 침대 아래 면에 있는 주머니를 기웃거린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다. 연월일을 읽는다. 시각과 요일도 마저 읽는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이상 전선 위에 올라서 있는 시력은 신기하게도 글자나 숫자를 읽는 데에 불편이 없다. 일주일 만에 뜰 수 있었던 왼쪽 눈을 오른쪽 눈이 외면하지 않았다. 왼쪽 시력과 오묘한 조화를 도모하였다. 기꺼이 수용했다. 이후 안고 살게 된 심한 난시의 눈 상태는 신비스러웠다. 안과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다. 신기의 눈이십니다. 시신경이 이 정도라면 실명이어야 옳은데요. 혹시 도저한 학문을 연구해야만 하는 학자라도 되시는지요. 그런 종류의 기도라도 하느님이 들어준 것이 아닌가 싶게 경이롭습니다. 내 눈은 오묘하다. 내 두 눈은 사람이 사는 데에 불편이 없게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오늘의 연월일을 시각과 요일까지 더해서 속독까지 할 수 있다. 순간 읽어내고 핸드폰을 다시 숨겼다. 침대 밑이었다.
2029년 1월 6일.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눈을 가만 감고 오늘이 토요일임을 새삼 인지한다. 날짜 인식하기 3단계에서 확인한 오늘의 요일을 직관하고는 한숨을 몰아쉰다. 연. 월. 일. 요일. 또 토요일이로구나. 마음이 급해졌다.
낙후된 시설이라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말끔하지 않을수록 남모르는 곳을 마련할 수 있다. 어수선한 가운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가. 이곳에 와서 첫 번째로 주문한 것이 비밀스러운 주머니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 치도 기대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와 첫 번째로 눈을 부딪힌 사람에게 청했다. 남자였다. 남자 간호사였다. 고대 희랍 신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신의 후계자라도 되는 듯싶었다. 울뚝불뚝한 근육이 가볍게 걸친 티셔츠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건강한 몸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중후한 몸매였다. 어쩌다가 내놓는 짧은 문장들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도 참 듬직했다. 간호사라는데 왜 사복을 입고 있느냐는 나의 소리 없는 언어에 말에 짧지 않으나 단정하게 답했다. 사복 간호사입니다. 아니고요. 방금 퇴근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침대 옆구리에 설치된 벨을 눌렀다. 곧 복도를 걷는 소리가 흐르게 들렸다. 문이 열렸다. 남자였다. 그 간호사였다. 휴~, 깊은 호흡을 할 수 있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간단한 몸의 언어로 종이와 연필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하얗게 빛나는 가운의 주머니에서 엽서 크기의 종이 한 장과 연필을 내놓았다. 그리 길지 않은 흑연 심을 고개 내민 연필을 좁은 손바닥으로 받았다.
"다녀올 곳이 있어요."
"그곳이지요?"
"......."
"어떻게 할까요?"
"저와 동행해줘요."
두 번째, 이전과 똑같은 리듬으로 두세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는 병실을 나갔다. 남자는 소리가 있었으나 여자는 몸짓 언어 소통이 가능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언어를 그도 몸짓으로 말해왔다.
깔끔한 스웨터에 적당히 바랜 청바지를 입은 소년이 들어왔다. 다시 돌아온 남자였다. 간호사였다. 옷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변신시킬 수 있구나를 실감하면서 무작정 남자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 들어오면서 함께 왔던 나의 차가 건물 주차장에 전시된 것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차 열쇠를 들어 내게 확인시키고서 남자는 자동차 문을 열었다. 딱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에 올랐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차를 몰았다. 몸이 참 편했다. 온몸을 편평하게 쭈욱 누인 침대보다 더 편안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른 숨을 쉬며 깊은 잠에 빠졌다. 두 시간 여 달렸을까. 차를 멈추고 남자가 말했다.
"일어나세요. 도착했어요."
바르르 온몸을 가늘게 떨며 여자가 눈을 떴다. 이번에는 눈짓 언어로 남자에게 말했다. 오후 다섯 시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점심도 맛있게 먹어요. 차에서 몸을 내려 여자가 들어간 건물에는 다음과 같이 큰 글씨의 상호명이 붙어 있었다.
< 선택적 함구증을 치료합니다. 병원 언(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