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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창작

하얼빈에 서다 - 김훈 선생님의 <하얼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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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선생님의 최신작 <하얼빈> 읽기를 끝냈다. 오늘은 아침 일기를 거르고 독후 소감을 쓴다. 책을 반환하였다. 나 혼자의 힘으로 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오늘을 살았다. 이런 내가 참 대견하다. 

 

 

 

내 인터넷 단골 서점 예스 24에서 가져옴

 

 

김훈 선생님의 최신작 <하얼빈> 읽기를 끝냈다. 대여해 와서 읽었다. 독서 후 쓰기를 위한 준비가 허술하다.  안타깝다. 내 가슴이며 내 마음을 저민 낱말들과 구절들과 문장들이 그립다. 미처 채록하지 못했다. 김훈 소설 기법이라고 하면 너무 기계적인가. 알맞지 못한 서술일까. 수없이 많은 우리 소설을 읽어왔다. 작가의 소설 창작법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대여섯 분 정도이다. 그 대여섯 중 정확한 작풍을 인지할 수 있는 작가가 김훈 선생님이다. ( 이문구 선생님과  박경리 선생님, 최인훈 선생님 등의 작품은 다음 기회에 거론하리라. ) 얼마 전 어느 유튜브( ? 그새 잊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던가? )에 출연하셔서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평생 이 글을 쓰겠다고 가슴에 안고 다녔노라. 드디어 썼다.'

 

문맥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안중근과 우덕순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안중근의 생과 우덕순의 생을 넘어선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그것이 내게는 깜짝 놀랄만한 발견이었다. 사실 나는 '책'에 대한 덕후 수준의 생을 산다. 최근 들어 많이 잦아들었지만 한때 나는 읽어야 되겠다 싶은 책은 꼭 사서 읽었다. 그런 만큼 온갖 책을 읽을 때마다 기대가 참 크다. 내 큰 기대에 이 책은 미치지 못했다. 그런에 이 상황이 나를 더욱 이 책에 , 책 속 문장과 문맥의 흐름에 매달리게 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두 애국지사의 심리 묘사를 단 한 문장의 억지 묘사 없이 지극히 평온한 상태를 표현한다.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두 분의 당시 생을 찬찬히 그려준다. 단지  두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 들여다보는 듯이. 작가는 문장을 쓸 때 마다 얼마나 큰 유혹을 곳곳에서 물리쳐야 했을까. 독자라면 당연히 내가 바라는, 내 상식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스토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는 것에 대한 답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생님의 마음 속 또 하나의 분신은 늘 선생님을 다그쳤을 것이다. '그 이상을 쓰지 않고 뭘 하는 것인가? 고작 여기에서 멈추려면서 평생 이 스토리를 기획했다고요? 겨우 이 정도의 글로 펼치려고요?' 분신은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노라고 소리 질러 외쳤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 만큼을 쓰려고 그 난리, 그 호들갑을 떨었단 말인가요? '

 

안중근. 그는 대인이다. 참으로 큰 사람이다.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도 옳다고 여기는 것에는 자기 마음을 굳혀 이끌어가는 위인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혹은 자기 가족의 생사 여부까지 합리적인 짐이 될 수 있도록 뒤처리가 말끔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처한 사람에게 가족도 맡기고 해결 대책도 세워 놓는다. 말하자면 앞에서 지레 서두르며 요란을 떤다던가 뒤끝 이미 끝난 것을 지지부진하게 붙잡은 채 허덕거리지 않는다. 참 깨끗한 삶이다. 

 

안중근은 예비 상황을 만들어 숨어들려 하지 않는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당당하다. 앞으로도 뒤로도 단 한 발자국 지저분한 뒷걸음의 요술을, 경망스러운 전진을 부리면서 비틀거리지 않는다. 도무지 바로 설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처해도 안중근은 이미 그것까지 예감하여 문제 해결 대책을 마련해 놓는다. 물론 해결된 후 결과에 대한 예상과 그 결과를 고루 점검하고 제2, 제3으로 확대되는 것을 자기 선에서 한정 짓는다. 그의 삶이다. 그가 사는 생의 철학이다. 

 

안중근, 그는 몸도 마음도 참 순결하다. 자기 육신이며 정신이 필요한 상황을 분별하여 고를 줄 안다. 마땅히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면 육신을 들이밀고 앞으로 나아간다. 최고의 정신을 모아 쏟으면서 덤벼들 수 있다. 그가 가진 내면의 힘이며 잠재된 힘의 무게는 감히 저울이나 자로 잴 수 없다. 

 

우덕순. 그야말로 순진무구의 전형이다. 순진무구 우덕순은 평생 천진난만함으로 사셨을 것이다. 그는 생활을 위해 굳이 꾸미지 않는다. 날것의 우덕순으로 산다. 한 끼 한 끼 가까스로 생을 연명하더라도 티 없이 맑은 우덕순으로 생을 버틴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우주를 사는 생명체들의 원시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고풍스러운 냄새가 날 것이다. 한편 가야 할 길을 안다. 자기 생에서 추진해야 할 최고의 것을 안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공통분모가 많다. 구한말 한반도의 자격지심을 익히 파악하였다. 진정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를 일찌기 간파하였다. 둘은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를 살아낸다. 꾸미지 않는다. 처해진 상황은 궁색할지언정 그곳을 헤쳐나감에 떳떳하다. 의연하고 버젓하고 넉넉하다. 곧은 길을 산다. 굳이 서로의 생각을 발성하는 언어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늘 순진무구의 눈빛을 교환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당하다. 당당하기에 욕 되지 않고 욕 되지 않기에 둘의 행동은 우아하다. 그 우아함이 한계를 넘지 않아 가장 올바른 선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토 히로부미의 목숨을 살려 총을 쏜 의미를 말해주지 못해 안타깝다던 안중근이 떠오른다. 

"나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절단된 약지(무명지)가 드러난 안중근의 손도장이 눈에 선하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름을 갖지 못한 무명지. 어쩌다가 다려 먹게되는 약물 휘저을 때 사용한다고 '약지'라는 넷째 손가락. 그는 왜 약지이자 무명지의 이름을 지닌 넷째를 절단했을까. 사형을 앞두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사형일자를 연장하겠다고 건의한다는 그. 그의 굳센 의지의 실천을 누가 따를 수 있으랴.

 

죽음을 며칠 앞두고 '동양 평화론'을 외치는 그를 살려낼 방법은 왜 없었을까. 조선이 없었으니 당시 바짓가랑이 정도의 왕이었던 순종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떤 상태이건 국부 순종이었다. 당시 우리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로든 존재 가치가 있어야 했다. 의지처가 되어줘야 했다. 병약한 순종에게 무엇을 바라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는 진정으로 한 집단의 대표여야 했다. 조상들이 벌인 난장판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연명하는 삶이었을지언정 왕은 왕이어야 했다. 그는 왕도 뭣도 백성도 못 되었다. 그렇다고 차라리 왜국에 우리 민족을 이끌고 파고들어갈 얄궂은 용기도 없었다. 머리 조아리고 굽실거릴 수 있는 패배의 온상도 못 되었다. 이도 저도 (좆도) 아니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김훈 선생님의 문장은 혼자 가지 않는다. 문장마다 각각 작가의 성은을 입을 수 있는 보자기를 만들어 놓는다. 승선하는 독자들을 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별도의 이미지 만들기를 할 필요가 없다. 김훈 문장과 동행하면서 밀월여행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즉문즉답 식의 섣부른 보여주기도 아니다. 당장 김훈의 문장과 함께 가는 통에 즉시 무엇인가를 떠올리려 할 필요가 없다. 대신 작품 속 주인공과 동병상련을 경험한다. 시대와 사회와 세계의 시류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대도 말이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매번 이런 충동을 느낀다. 문장을 마칠 때마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것을 마구 쓰고 싶어진다. 마구마구.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읽은 문장 끝에 떠오르는 수많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연필의 힘을 빌려 하양 백지에 풀어놓고 싶다. 그러나 다음 문장이 궁금한 것을 어쩔 수 없다. 다음 사건을 좇아야 하기에 멈출 수 없다. 김훈 특유의 문장을 읽으면 어김없이 기대되는 문장의 품이 나를 이끈다. 세기적인 강력 사건일지언정 더없이 잔잔하게 진행하는 김훈 문장의 매력이 나를 이끈다. 하여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잊혀지고 마는 생각들이 소중하게 내 뇌리에 간직된다. 차곡차곡 쌓여 내 힘이 되어준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어슴프레 분위기로만 남아있는 김훈 소설에서 구원낸 내 생각들은 꼬깃꼬깃 부피를 줄여 내 기억 세포에 저장한다.

 

김훈을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황홀하다. 그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의 생각을 읽을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음악적인 선율과 그림 같은 풍경들과 인심을 담고 있는 거리, 철학을 묻게 하는 문맥 사이 성스러운 틈까지 내가 부릴 수 있는 온갖 마법을 김훈의 글을 통해 초월의 경지로 이끌 수 있다. 김훈 선생님의 문장은 묘한 반복의 힘으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먼 후일 대한민국의 혹은 한민족이 쓴, 한글로 표기된 소설의 역사 매김 시절이 오면 '김훈 표' 문장으로 우뚝 설 것이다. 나는 김훈의 문장, 김훈의 글, 김훈이 사용한 낱말들, 김훈의 손에 의해 조합되는 낱글자들 하나하나, 층층이 쌓아두고 그 위에 누워 인생의 다양한 층을 여행한다. 가끔은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서 마감하는 순간을 맞이하고도 싶다. 너무 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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