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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밑줄 치기를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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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치기를 멈추자.

 

 

 

우리 집 책장 일부

 

겨울이었지. 

지난겨울 시작 즈음이었어.

제법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을 거야.

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이라 여겨지면 초조해지는 마음 알지?

이상했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것 있잖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터질 것 같은 마음. 

어떡하지?

세월이 또 일 년을 보따리에 싸안고 훅,

사라져 버리려던 그 지점.

느낄 수 있을 뿐

 

감정을 어찌 정리할 방법이 없던 어느 날

계획한 휴가

그 휴가에 나는

방안퉁수 역을 운명처럼 소화해낼 것이 당연하고

내 꿈, 석 달 열흘, 밥도 죽도 떡도 필요없고

영화와 글과 실내운동으로만 매일을 지내자 다짐했지.

지극히 나다운 날을 보내기로 맹서한 날.

책을 빌렸지

일터 도서관에서.

 

도서관에 갔어.

드문 길이었어.

늘 가고 싶은 길,

도무지 걸음 쉽지 않은 현실,

뭉그러뜨린 현실을 딛고 가는 걸음이 참

맛있었어.

사서의 얼굴 낯설었는데,

아직 사람으로 살고 계셨군요.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상대가 내게 말을 건네왔어.

누구신지요.

아하, 우리 그곳에서 만났잖아요.

그곳이요?

그래요. 그곳, 꿈속에서요.

책더미에 깔려 그만 죽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아하, 맞아요.

우리 그곳에서 만났지요.

책이 길을 내고 책이 방을 만들고 책이 성을 쌓아놓고 우리를 초대하던 곳이었던가요.

 

집어든 책이 열한 권.

이미 지나간 열한 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한 권.

마지막 한 해 열두 번째 달은 내가 책이 되기로 하고.

무거움마저 사랑했던 그 날

낑낑거리며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생의 하루인가를 체험했던 그 날.

 

마침내 겨울 휴가가 시작되었던 날.

오른쪽 왼쪽 귀퉁이마다 접어야 했고

한번 접은 곳을 다시 적어 이중으로 접어야 했고

결국엔 밑줄 치기를 하고 말았어요.

나는 냅다 밑줄을 그었고

심지어 두세 번씩 두껍게 그은 선 끝에 별도 예쁘게 그렸어요.

 

하지 않았어야 했어요. 

밑줄 치기는 자본의 속성을 인내할 때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만 다짐을 기억 저쪽에 냅다 버렸어요.

귀신이 들린 마냥 좍좍

죽죽

쭈욱

밑줄을 그었어.

그었더랬어요.

 

그러므로 지난겨울 나의 생은

밑줄 치기만으로도 참 찬란했다는 것. 

 


오늘, 그 열한 권의 책을 반납하였다. 읽는 도중 시립 도서관이며 집 책장에 있는 책들을 함께 읽느라 그만 긴 시간이 되고 말았는데. 하지 않기로 했던 밑줄을 긋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밑줄을 지우느라고 무척 힘들었다. 그것 보통 일이 아니더라. 

 

오늘은 딱 다섯 권만 빌렸다. 밑줄을 긋게 되더라도 짐이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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