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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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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오늘 오후 여섯 시 경 하늘 1

 

 

바람이 분다. 태풍이 또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마돌'이라는 이름이란다. 난마돌(NANMADOL)은 미크로네시아에서 제출한 그곳 유명 유적지의 이름이라고 한다. 태풍은 60시간 이내에 온대저기압으로 변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를 지난 즈음엔 강풍 정도일까. 모쪼록 '클 태(太)'를 벗어 던지고 강풍, 경보, 주의보 등으로 장식하지 않은, 그저 '바람'으로 지나가기를. 

 

'미크로네시아'라는 국가 이름을 떠올리고 보니 전쟁사에 한참 열을 올리고 공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모든 내용은 그저 실루엣 정도로만 내 뇌리에 남아 있지만 세계사를 엮어가는 전쟁사에 집중했던 시절이 아름답게 떠오른다. 아름답다니 전쟁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아니다. 그저 무엇인가에 몰입했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나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내가 대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름 따라 용이 가고 바람 따라 구름 간다고 하지 않던가. 정성 들여 살면 자그마한 기쁨의 조각들 모이리니!

 

오늘 오후 여섯 시 경 하늘 2

 

 

또 헛소리다. 북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미크로네시아는 태평양 전쟁사로 내게 익숙한 국가명이다. 2차대전 때 태평양의 섬나라들을 두고 벌였던, 서구 여러 나라들이 관련되는, 특히 미국과 일본 간 싸움이 기억된다. 미드웨이 해전이니 진주만이니 열심히 전쟁을 진행하지만 결국 육해공의 합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천황 앞의 맹세를 앞세우고 보니 결국 패전으로 무릎 꿇은 일본. 내심 그런 일본의 입장에 통쾌하면서도 결국 내 나라 당시 꼴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결론 맺었던 기억들. 지금은 아름다운 자연 자원을 관광 산업화하여 살아가는 태평양의 섬나라들, 그중 한 국가인 미크로네시아는, 그곳 아름다운 바다 모습의 사진들을 떠올리면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이다. 

 

 

 

오늘 오후 여섯 시 경 하늘 3

 

 

미크로네시아의 유적 이름을 달고 온 태풍 '난마돌'의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의 시작 시각을 이불 속에서 연장하고 있었다. 먼저 일어난 사람은 열이 많아 베란다며 거실 등 문 이곳저곳을 열어뒀나 보다. 바람이 블라인드를 거칠게 밀어붙이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바람의 정도라면 틀림없이 박완서 선생님의 단편 <자전거 도둑>의 수남이 도시에서 만났을 바람이다. 체크 담요를 대여섯 번 끌어올려 목을 감싸면서 으르렁대는 바람 소리의 강도를 낮춰 듣는데 단편 속 수남이 그리워했던 고향의 바람이 떠오른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가져옴

 

 

<자전거 도둑>의 수남은 70년대 소년이다. 돈을 벌러 무작정 상경하였다. 그가 일하고 있는 가게는 청계천 세운 상가 뒷골목의 전기용품 도매상이다. 그는 야학을 위해 밤새 공부에 몰두하는 건전한 청소년이다. 이런 그를 가제 주인아저씨는 참 듬직하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어느 날 간판을 떨어뜨려 지나가는 아가씨의 머리통에 내리칠 만큼 거센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수남은 주인아저씨의 명령으로 형광등을 배달하러 간다. 자전거가 수남의 교통수단이다. 형광등을 받아 파는 가게 주인이 형광등 값을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들로부터 돈을 받아 금고에 넣으면서도 이 이유 저 이유를 들이대면서 대금을 주지 않은 아저씨에게서 하루 운을 미리 배정받는다. 

 

 

 

가까스로 돈을 받아 내려오니 길가에 세워 둔 <자전거>가 엎어져 있다. 바람이 몰고 올 또 하나의 돌풍이 한판 벌어져 있다. 쓰러져 있는 자전거를 일으켜서 타려는 순간 한 남자가 달려와 수남을 윽박지른다. 수남이의 자전거가 쓰러지면서 자기 명품 차가 긁혔다는 것이다. 수남은 난감하다. 그는 보상을 요구한다. 오천 원을 말한다. 오천 원, 당시 오천 원은 지금 시세로 얼마나 될까. 형광등 대금으로 받은 일만 원을 만지작거리면서 당황해하는 수남이에게 남자는 자전거에 열쇠를 걸어 못 움직이게 한다. 몰려든 사람들이 수남에게 외친다. "도망가, 자전거 들고 어서 도망가."

 

용기백배한 수남은 자전거를 들고 가게로 도망쳐 온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자전거를 안고 바람을 안고 달려 돌아온 수남을 보고 놀란다. 앞뒤 묻지 않고 수남에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칭찬을 퍼붓는다. 수남은 돈을 벌어 오겠다고 집 떠났다가 도둑놈으로 돌아왔던 형이 떠오른다. 자기 행위도 도둑질이 아닌가를 생각하며 밤은 샌다. 더군다나 자전거를 안고 돌아오던 길 느꼈던 쾌감이 자꾸 떠오른다. 형에 이어 수남 자신도 도둑놈이 될 운명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다.

 

자기 얼굴이 똥 빛으로 보인다. 수남은 주인아저씨의 입에 바른 칭찬을 버리고 짐을 싼다. 돈을 벌어 오겠다고 떠나온 시골집을 떠올린다. 드센 도시 바람으로 인한 사건을 떠올리면서 시골에서 맞던 따스한 봄바람을 떠올린다. 봄바람으로 아름다운 물결을 일으키던 보리밭에 일던 바람.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자연의 순환에 몸 맡겨서 살던 시절로 돌아간다. 밤새 자기 양심을 쫓아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수남이는 충분히 멋진 삶을 살아낼 것이다. 

 

추석에 담아온 달개비꽃

 

 

내게 왔던 바람들을 떠올려본다. 참 어중간한 바람이다. 초등시절부터 도시로 유학을 떠나온 내게는 보리밭 물결을 일게 한 아름다운 바람 등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참 짧다. 그렇다고 강하게 들이닥쳐서 내게 견디고 이겨내면서 극복의 힘을 기를 수 있게 할 바람을 만난 기억도 거의 없다. 하여 가끔 내 어린 시절을 되돌려 본다. 심지어 내 지나간 생의 모습을 바꿔 배치해본다.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낫을 들고 우리 집 보물이었던 소의 여물이 될 풀을 베는 나를 떠올린다. 농사꾼 딸답게 땅을 파고 살아낸 청소년기가 내 생에 자리했다면 현재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몸빼 차림으로 평생을 사신 어머니 덕분에 소위 대통령이 임명한 전문직을 사는 내가 참 어설프고 안타깝다. 엉성하고 허술하기 그지없다. 물론 내 탓이고 나의 탓이고 내가 살아온 방법 탓이다.

 

물론 늦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맹렬하게 살아보자. 아직 늦지 않았다.' 느려빠진 채 흐느적거리는 매일을 사는 내가 불쌍히 여겨질 때 나를 달래는 다짐이다. 살아보자. 처절하게 혹은 철저하게. 설령 내 수고가 베 주머니로 바람 잡기가 될지언정 부드러우면서 한편 단단하게 앞날을 살아볼까 한다. 내게 박수를 보내면서 새로운 한 주의 준비를 위해서 출발!

 

 


 

내 드로잉 '하비에르 보텟 2'를 앞서 올렸다. 아쉬움 크지만 멈췄다. 책 '사할린'을 읽어야 했기에 부지런히 그렸다. 남은 오늘은 부지런히 김훈 선생님과 데이트를 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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