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길을 늘려 아침을 걸었다

반응형

 

 

 

길을 늘려 아침을 걸었다.

 

 

출근길 1

 

 

일곱 시에 집을 나섰다. 태풍 '난마들'의 힘이 아직 머무르고 있나 보다. 일어나 베란다 문을 바로 열었다. 흐린 시야 속에 아파트 앞 동을 감싸고 서 있는 나무들의 가벼운 춤사위가 잡힌다. 보통 부는 바람에 비해 조금 강한 정도의 움직임이다. 태풍의 남은 조각들이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이다. 바람은 나무가 춤출 수 있도록 기본 리듬과 가락을 제공한다. 일정한 간격의 반복이 현대인들의 음악 취향을 닮았다. 제법 순둥이가 되었다. 짐작하건대 아직 덜 깬, 간밤 짧았던 수면에 아쉬워하는 두 발에도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출근을 서두른다. 어서 나가자. 길을 걷자. 하루를 출발하자.

 

 

현관을 나서면서 이어폰을 낀다. 오늘따라 출근을 위한 통과의례가 단순하다 싶다. 아하, 마스크가 없구나. 다시 들어가 마스크를 들고나와 개봉 박두한다. 그야말로 순백이다. 흰색은 공식 용어로 '하양(white)'이면서 어떤 종류의 책에서는 '흰눈색' 혹은 '흰색'으로 표기된다. 인류사 속 질병 관련 물건들이나 상징이나 로고 등을 대부분 흰색으로 고정하다시피 한 것은 왜일까? 거리를 나서는 순간 오염 뒤범벅이 될 것이 뻔한데 이 흰색 날 것을 두른다는 것이 괜히 미안하다. 마스크에게? 아니다, 흰색에게!

 

 

'희다'는 모든 빛을 모아 반사함을 의미한다. 불투명의 색조 중 가장 밝다. 이 밝은 빛은 아무런 색이 없다. 밝디밝은 무채색이다. 흰색은 모든 빛을 모아 하나가 된 마음 넓은 포용이다. 한 점 흠도 없을 때 가능한 청결이자 순진무구이자 순결이다. 흰색, 하양은 맑음이 튼튼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세척한다. 

 

 

출근길 2

 

 

공식 용어 중 하나로 기록되는 '흰눈색'을 이야기해보자.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은 '흰눈색'이라는 명명을 나는 소중하게 모신다. 가끔 겨울 그리울 때 살짝 꺼내어 만져보는 낱말이다. 신새벽, 한겨울 새벽 밤새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듯한 눈 세상을 본 적 있으리라. 먼바다를 들먹이며 살아야 했던 나의 고향은 내륙 쪽에 가까워 많은 눈이 내렸다. 채 몇 년 살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내 어릴 적 겨울 세상은 온통 눈밭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겨울이 눈만 내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흰 눈밭은 유독 많은 추억을 간직하게 했다. 그중 하나만 꺼내 본다. 한양 땅에 유학을 가 있던, 젊은 부모님 같은 우리집 장녀와 장남이 금의환향하던 날은 항상 흰눈밭 위에 나를 서게 했다.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나긴 역사를 지닌 마을 지킴이 나무 아래 개구쟁이 남동생과 기다리던 손님 둘. 순백의 왕자님과 순백의 공주님이 내려오신단다. 온 집안이 뒤집혔다. 일 년에 딱 두 번 하는 대청소의  날 중 한 날이었다. 설날과 함께. 명절날 운행에 맞춰 손님맞이의 절차가 진행되었다. 누추한 우리 집을 찾는 왕자님과 공주님에게 우리의 순수 열정 일백 퍼센트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하여 며칠 바빴다. 마침내 그들이 당도하던 날, 늘 흰눈밭 위에 서서 눈앞에 서 있어도 늘 아득해 보이는 사람들을 모시고 대문을 열었다.

 

순백은 모든 오염 물질과 오물과 티끌이 존재할 수 없다. 정갈함과 청결함과 맑고 깨끗함이므로 우리들의 뇌에 각인되었다. 숭고의 미학이다. 흰눈색의 전율과 함께 고요와 적막과 순결함의 연례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와 그녀 역시 어머니로부터 탯줄을 잘라냈던 곳이었지만 이미 딴 세상 사람이었다. 특히 긴 생머리의 중간 가르마를 탄 큰 언니는 키 작은 올리비아 핫세를 방불케 했다. 도도한 눈빛에 말이 없던 그도 조용한 가운데 눈빛 사람으로 며칠 머물다가 떠났다. 왕자와 공주님이 떠난 뒤에 나를 사로잡던 공허는 나 어린 사람에게도 큰 벌이었다. 그와 그녀는 어떤 세상에서 사는 것일까. 문득 흰눈빛 위에 누워 하늘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누군가 다녀갔지요?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잠시 지구에 내려온 환상인가요, 아니면 허상일까요.

 

호박꽃과 달개비꽃의 동거

 

 

어릴 적 추억 한 컷을 햇빛에 내걸고 걸었다. 내 입은 여전히 마스크를 씌우지 않은 상태였다. 팔에 한쪽 귀걸이를 건 마스크는 히끗히끗 제 속을 보여준다. 가동하면 입술과 바로 만나는 마스크의 안쪽을 두루 살펴본다. 티끌 하나 없다. 그 흰색 그대로를 오늘 하루는 유지하게 하고 싶어졌다. 마스크는 내 팔에 걸린 채 순수의 염을 다하면서 나의 출근을 동행하고 있었다. 하여 내 출근길을 5분여 길게 늘어뜨려야 했다. 유달리 오늘은 지나치는 사람이 없는 길이었지만 가끔 보이는 앞 사람을 피하려 옆길을 거쳐 걸었다. 윗길, 아랫길도 거쳐 길을 걸었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삼십여 분의 출근길을 걸었다. 출발하던 모습 그대로 마스크를 팔뚝에 채운 채 일터에 도착했다. 날씬한 내 팔에 마스크가 걸리는 것쯤 내 고집 드러낸 의상 일부가 될 수도 있겠다. 

반응형

'라이프 > 하루 공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세월  (23) 2022.09.21
여름옷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은~  (32) 2022.09.21
바람이 분다  (62) 2022.09.18
무려 10시에 직립하였다  (52) 2022.09.17
땡감이 떨어지는 시절  (52) 2022.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