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러운 여자여!
오랜만에 차를 몰았다. 차에 오른 김에 꽤 먼 길을 달렸다. 오랜 기간 운전을 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여러 가지가 생경했다. 신호등의 색깔에 맞춰 가고 운전을 하고 다시 멈추는 것까지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무척 조심스러웠다. 차를 타면 꼭 듣는 CD의 ‘겟세마네’를 크게 들으면서 운전을 했다. 감람산도 감람 기름도 본 적이 없으며 가롯 유다의 밀고에도 관심이 없는데 왜 이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 음악을 노래 부른 많은 가수의 소리를 녹음하여 운전할 때마다 듣는다. 무조건 좋다.
몇 달 만에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길을 걸으면서 보던 풍경들이 사뭇 낯설었다. 초록색 신호로 바뀌자마자 어린 꼬마가 재빨리 첫 번째 주자로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횡단보도를 걷는 내내 녀석은 그냥 걷지 않는다. 온몸을 움직여서 보도를 건넌다. 신나는 일이 있나 보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분명 학교도 학원도 아닐 것이다. 집밥을 먹으러 가는지 고소한 간식을 취하러 가는지 아이는 마냥 신이 나 있다. 부럽다. 집밥을 해 주실 엄마가 계신다는 것이 참 좋겠다.
큰 사거리의 한중간에 선다. 신호등을 만날 때마다 붉은색 신호를 맞았다. 오늘은 설 때마다 첫 자리이다. 나부터 멈췄다는 것이다. 매번 내 차가 내 길의 1위에 서게 했다. 좀처럼 첫 번째, 처음, 1위, 맨 앞에 선 기억이 별로 없는 나는 이럴 때 가슴 두근거린다. 내 뒤로 쭉 서 있는 차들을 내가 이끌어야 한다. 재미있다.
우쭈우쭈 우쭈쭈. 나를 달래던 차 빨간 잠자리가 날아와 왼쪽 와이퍼 중간 부근에 앉는다. 내 눈과 나란한 위치다. 붉은색 몸 자랑을 하려는 것일까. 몸 전체가 붉은 것을 보니 수컷인가 보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5, 6월 우화(羽化)를 거쳐 11월 정도까지 성충으로 있을 시기이니 암컷을 어서 찾아야 할 텐데. 어서 가거라. 네 몸매며, 네 날개를 자랑하는 것이 바쁜 일이 아니다. 잠자리는 암컷이 자유 부인이다. 수컷은 어서 가서 자기 생활 범위 안으로 암컷을 모셔와야 한다.
녀석. 그대가 살 곳은 늪이나 연못인 것으로 아는데, 어서 가거라, 어서. 네 먹이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서 어서 먹고 고운 짝꿍도 만나고 번식도 하고 하늘도 날아다니렴. 푸른 하늘을 무대 삼아 네 춤사위를 마음껏 펼치렴. 고추 잠자리 날면 김장할 배추 파종기라고 했다. '입춘 블라블라'로 무더위를 짜증스러워했는데 가을이 곧 오긴 오려나 보다.
오늘 올해 안에 내가 해내야 할 의무의 일을 셋 마쳤다. 나 혼자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어서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찮아서 미뤄뒀던 일들이었다. 시원섭섭하다. 홀가분함을 즐기기 위해 가끔 가곤 하는 카페에도 들러 맛있는 생강차 한 잔을 마셨다. 어여쁜 여자 주인은 꼭 부부가 만든 고운 모자를 쓴 채 일을 한다. 목소리가 참 부드럽다. 하얀 솜사탕의 달콤함이 그녀의 문장에 묻어있다. 카페 내부에는 그녀와 남편이 만든 염색작업과 재봉틀 작업으로 만든 머플러와 모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강유리로 외부와 차단한 벽면 아래 불거진 단에는 그녀의 남편이 붉은 흙으로 만든 조작작품들이 환조와 부조로 앉아 있다. 천벌처럼 몸뚱이로만 앉아 있는 토르소가 아니라는 것이 참 다행이다.
어젯밤 한양 땅 폭우 소식에 잠들어야 할 시기를 놓쳤다. 조카 둘과 조카사위의 안녕을 확인하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물과 사투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참 가슴 아팠다. 꼬박 밤을 새웠다. 눈을 붙인 시각은 새벽 네 시였다. 참, 오늘은 한 끼만 빵빵하게 먹었다. 한 끼라도 적당량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속이 좋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어제부터 그리던 근육 맨 드로잉을 보충하고 나니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간다. 어서 자자. 영화도 책도 없이 산 하루는 참 재미없다. 그리고 힘이 없다. 나는 오늘 과연 숨 쉬고 살았었나 싶다. 아하, 운전을 하면서 음악 '겟세마네'는 오지게 들었구나. 다행이다.
"이런, 별스러운 여자야! 책이 그대 밥 먹여주는 것 아니고, 영화가 그대 죽 써서 대령해주는 것 아니고, 음악이 여자의 가슴을 진정 달래주는 것 아니지 않던가, 아서라, 아서라. 아서라. 그저 그런 메뉴로, 남들 하는 것 하면서 맘 편하게 살거라."
앞서 내 그림 내사랑 샐리 호킨스를 그려 올렸다. 실패작이지만 그녀를 그릴 수 있어 행복했다. 에단 호크가 서운해 할까. 이미 서너 장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은 서운하리라. 에단 호크여. 그대도 보고 싶다. 곧 그대, 다시 한 장을 그려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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