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이다.
나에게 '퍼스낼리티(Personality)'라는 자양분이 형성되고 점차 이드(id)에서 자의식이 잉태되고 생산되어 이를 스스로 느끼 게 된 이후 줄곧, 나는 불면증을 앓아왔다. 두 눈 꼭 감고 잠을 자야 하는데, 검은 이승을 뚫고 나아가 저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와야만 하는데, 나는 그만 조물주가 인간에게 하사한 선물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저녁, 그리고 잠이라는 낱말을 내 삶에 연결하면 안온함으로 충만했던 밤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이토록 기나긴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하는 삶이라면 정시 출퇴근의 내 직업을 때려치워야 했다. 한데 그러하질 못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안정적이라서? 삶의 평안함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라서? 이것들은 아무것도 그 이유가 되지 못하면서 모두 다 확실한 이유이다. 쉽게 말해서 살아야 했다. 다시 말하면 소심하지만 평온한 정도의, 적당한 수준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만 했다. 머리만 움직이면서 살아낸 것이다. 공부 끝에 잡은 직업이어서 더는 아무것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쉽게 말해 용기가 없었다. 남들이 쉬이 붙잡기 어려운(? 어느 정도는,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직업에 안착했으므로 굳이 생트집을 잡아 과감하게 이직이라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낮에는 말이다. 새벽녘에 늘 떠올리는 '때려치우자'가 '아침 잠깐 버티지 뭐', '며칠 탈탈 털고 나면 또 잠들 수 있겠지. 그렇게 충전하기로 하고.'의 방식으로 은근히 내 직업에 또박또박 미운 정미며 고운 정을 쌓아왔다.
젊을 적, 불면의 밤을 며칠 지새우면 두통으로 아침 두세 시간은 참 힘들었다. 꾸역꾸역 먹어가면서, 박박 기어서 일터에 출근하고 이런저런 일을 해내다 보면 시간이 가고, 다시 몸은 해가 비치는 대낮에 적응하고, 뿌연 안개가 나의 뇌세포에서 점차 걷혔다. 마침내 하루가 어제처럼 그렇게 가는, 그런 식의 나날을 살아냈다. 그러므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아침 두세 시간이 참 힘들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습관이 생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식 업무 시작 시각인 9시가 되기 전에 나의 불면이 두고 가는 머리 지끈거림의 강도를 낮춰 놓아야만 했다. 하루 이틀 불면이지 노상 나 불면증을 사는 여자임네 외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이른 아침, 일터에 가서 한두 시간을 커피와 음악과 그림 읽기, 시 읽기 등으로 다독거리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또 살아낼 수 있었다.
하기는, 열정 충만했던 젊은 청춘의 시절은 가끔 여러 날의 불면을 즐기기까지 했다. 특히 긴 휴가 즈음이면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 전의 설렘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평일 불면의 밤을 깡그리 잊을 수 있는 휴가 기간의 불면이었다. 심지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무한 지경의 때와 곳에 상상의 세계를 펼쳐 놓고 그 속에 나를 던져 즐기는 야행성을 때로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합리화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뭐, 어떻다고? 그래, 오늘 일기를 이 주제로 쓰는 이유를 밝힌다.
이제, 이 직업의 세상을 접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내가 와 있다. 나의 인생 수직선의 흐릿한 '끝'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 살아생전의 날보다 훨씬 적어진 때에 서 있다. 그런데, 요 며칠 불면의 날을 제법 여러 날을 살면서 이상한 기류가 있어 신기하다.
불면 다음 날 아침의 두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불면이 계속되기 시작하면서 맞이하는 아침이면 강철의 둔기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험지 속 두뇌였던 곳에 불의 기운이 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쇠한 뇌세포가 힘을 잃었기 때문일까. 불면의 밤을 보낸 다음 날의 두통마저 사라진 것은 더는 별다른 기운을 생성시켜 놀라게 하고 수면의 밤을 회복하게 하려는 의지를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일 필요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일까. 원기 회복을 위해 노력하라는 경고를 할 필요도 없는 몸뚱이, 일으켜 세울 신경세포가 더는 필요하지 않은, 빈 몸뚱이가 된 것이기 때문일까.
정작 두려운 것은 며칠 전 우연한 시청으로 확인한, 그다지 크게 연로한 나이도 아닌 어느 시골 아주머니의 치매 현상 확인 때문이다. '불면'에 꼭 따르는 것이 '치매'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내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주변 지인들에게도 자꾸 확인시켜 둔다. 혹, 나, 늙어 내 아이 곁을 맴돌려고 하거든, 지저분한 본능을 작동시키려고 하거든, 내 아이에게 명령을 내려다오. 다음처럼.
"네 엄마 건강에 문제만 있다 싶으면 바로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정신 총총할 때 늘 했던 말이다. 그에 따라라. 지금 너에게 들러붙어 생은 연명하려는 것은 늙어 정신 흐려지니 하는 것이다. 네 엄마 온전할 때 했던 말을 따라라. 어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보내 드려."
물론 아직 내 아이에게는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블로그에 '유언'으로 자세하게 적어뒀다. 아이에게 어미의 블로그를 들춰보라는 말까지는 해뒀다. 아마 내 아이가 결혼하여 사는 시기에는 당연한 방법일지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내 아이 아무런 흔들림 없이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말이다. 치매, 질병 징후만 보여도 연금을 앞세워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것.
나의 소원이다.
올해 겨울 들어 온전한 잠을 잔 것이 며칠 되지 않는다. 새해 들어 오늘까지 52일째를 말이다. 우리 옛 기온 삼한사온처럼 내 수면 주기도 이와 비슷하다. 이수 삼불, 삼수 사불? 최근에는 특히, 불면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강의였던 어느 노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자는 쪽을 택해 생활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시간이고 하루 이틀이지 쉽지 않다. 어젯밤에는 어서 책을 읽고 도서 반납일을 지키라는 남자의 명령이 있어 불면의 밤을 독서로 채우자고 다짐했다.
사나흘 효과를 봤던 약국 판매용 안대를 착용했다. 이삼십 분을 지탱했나. 안대 작용을 밤새 두세 번을 하고서도 새벽 네 시 30분까지 눈 뜬 밤이었다. 독서를 해? 에구머니나. 한 시간에 열 장 정도로 읽어지더라. 불면의 밤은 온전하지 못하다. 비몽사몽의 밤이다. 불면의 밤에는 사실, 온전한 수면을 즐길 수 있는 낮이나 아침 시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초조와 긴장으로 인한 뇌의 좌불안석이 일그러진 밤으로 진행되더라. 밤새 50페이지를 읽었나? 영화 산문집을 읽었는데 남은 내용이라야 영화 제목 정도이다. 다시 읽어야 한다.
차라리 영화를 볼 것을. 하루 시작을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한 생각이 고작 이렇다. 어쨌든. 불면의 밤을 보낸 후에도 머리 지끈거리지 않은 이 현상을 나는 즐겨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다. 늙어가는 길이 참 복잡하다.
일단 더는 안 된다. 오늘 밤은 꼭 자야 한다. 햇살 앞에 내 온몸 불사르기를 좀 하자. 제발, 수면의 여신이여. 나를 사랑해 달라. 오, '히프노스(Hypnos)'여. 내게 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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