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을 받고 보니~
며칠 전 일이다.
아침 여섯 시를 갓 넘어 출근길에 나섰다. 전날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한 채 퇴근했기 때문이다. 일터 단체 회식 날이었다. 밀린 일이 있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열심히 움직였지만 정작 꼭 해야 할 일을 마치지 못했다. 다른 때 같으면 정식 퇴근 시각을 넘겨 얼마든지 일을 해냈겠지만, 단체 회식에 늦은 참여도 눈엣가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일을 내일 아침으로 미뤘다.
단체 회식으로 끝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식이면 마시는 소주 한 잔 정도를 왜 지키지 못했을까. 젊은 사람들의 2차를 따라갔다. 어중간한 입장에서 함께하게 된 늙은 여자는 드넓은 커피집, 아니 맥줏집이 맞겠구나. 내 몸을 제법 넓은 룸 한쪽에 구겨진 채 내던졌다. 우렁찬, 젊은 소리들에 귀 기울여야 했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내용이 없는 입놀림에 불과했다. 아, 목소리로도 충분히 나이의 적고 많음을 확인할 수 있겠구나.
차라리 문 쪽에 앉을 것을. 어중이떠중이 물결 속에 섞여 동행하다 보니 주목받는 자리는 피해야겠다 싶어서 깊숙이 들어앉았다. 내게 무의미한 자리이지 않나 생각되어 무리에서 빠져나오려 해도 슬쩍 나오기가 어려웠다. 내 옆자리에는 수직선의 0점을 기준으로 내 나이에 양으로 가까운 이가 앉아 있었다. 다행이다. 몇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데에 그도 선뜻 응해주었다. 고마웠다.
내 앞자리에는 일터 우리 팀의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아, 이 또한 얼마나 행운이냐. 그는 피규어 컬렉터였다. 나의 남자 '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 피규어며 '히스 레저'며 '어벤저스' 시리즈의 각종 피규어를 사진으로 보여줬다. 일단 컬렉터라는 점에서 강한 소통이 확실했다. 그는 독서 모임도 참여하고 있었다. 책을 이야기하고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시를 이야기하고 소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그는 신혼이었고 오매불망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전화에 룸을 금세 떠나고 말았다.
1차에서 몇 잔 마시고 만 소주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흡수한 돈육으로 배는 빵빵하게 불러 있었다. 2차에서도 이어진 내장을 향한 소주 세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천천히 마셔도 젊은이들의 대열에 서 있기 위해서는 잔 수가 늘어나고야 말았다. 그날 아마 한 병 가까이 마셨으리라. 가까이 10년 안에는 이렇게까지 마신 적이 없다. 소주잔으로 대여섯 잔? 아니 한 병을 족히 되었으리라. 더 열심히 안주를 주워 삼켜야 했다. 취하면 안 되니까.
젊으면 좀 취한들 씩씩하게, 입 쓱 닫고 소리 한번 지르면, 세상이 사람 앞에 잠깐이라도 고개 숙인다. 늙으니까 그것은 아니겠더라. 무서워하면서 마시는 소주인지라 잔 한 컵, 두 컵, 세 컵......, 늘어날 때마다 불안해지고 채워지는 잔을 거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내가 왜 여기 함께 와 있는가에 대한 반성을 꾸준히 하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참 어려웠다.
점차 흐릿해져 가는 정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열한 시가 넘어서자 배 속 내장이 더는 그 어떤 음식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포를 내게 해 왔다. '선포'에도 강한 의지를 불사를 만한 경고 신호와 압박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얼마나 좋았으랴.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속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옆 사람에게 내 내장의 소란이 들릴까 봐 급급해하다가 결국 일어섰다. 옆 사람이며 앞사람과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면서 대화하는 젊은이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했다. 옆 사람에게만 조용히, 조용히, 먼저 가야겠다는 눈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그는 일터 우리 팀이 아니었다. 붙잡지 않았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사였다.
가게 앞에 나와보니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는 제법 넓이를 지닌 공원 안에 있었다. 이 가게는 공원 화장실을 사용하나 보다. 눈 휘둥그레 움직이면서 공원 화장실을 찾았다. 분명 공원은 최신 시설을 넣어 리모델링을 했다고 들었는데 화장실은 사용 상태가 여전히 7, 80년대였다. 아, 공원 화장실은 밤 청소가 되어있지 않았다.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의 지나친 결벽증이 문제겠지 싶으면서도 화장실의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다.
달렸다. 밤이다. 누가 나를 알아보랴. 열심히 달렸다. 보통 걸음으로 2, 30분, 경보 속도로 10분, 15분이 걸릴 거리를 쏜살같이 달렸다. 내 집 화장실을 향해 내 몸을 '휙' 날렸다. 휘파람의 속도로 날렸다. 진짜로 '벼락같이'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휘이이이익! 우리집 현관 앞 화장실 변기통에 출발 후 딱 10분 만에 앉을 수 있었다. 내장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냈다. 밤새 공모양으로 부풀었던 배가 단숨에 쏙 들어갔다. 하루, 회식 관련하여, 음주 관련하여,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니 나이에 맞게 살어라, 살어라, 살어리랏다.'
'니 나이가 몇이냐. '내 나이가 어때서'는 트로트니까 가능한 거여. 니 나이는 이제 어떻지 못해. 제발 좀 참아라. 뭔 2차냐.'
'술도 그래야. 잘 지켜 왔잖여? 딱 한 잔만. 딱 한 잔만이다. 엉?'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하룻밤 심심풀이에 불과하다.
내일 아침에는 꼭 빨리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다는 다짐을 여러 번 세뇌한 후 잠들었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들으면서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내일 아침에 나를 꼭 새벽 여섯 시 이전에 깨워서 일으켜 세울 것을 부탁, 또 부탁하면서 말이다. 의외로 이른 출근이 어렵지 않았다. 전날 밤 뱃속을 정리한 것도 큰 힘이 되었으리라. 출근길도 최단거리를 택해 걸었다. 정식 출근 시간 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말끔하게 처리하여 제출했다. 물론 더 멋지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정도를 최소한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나이 들고 보니 멋지게 꾸미는 것에 크게 매달리지 않게 된 것이 단시간 일 처리가 가능한 원인이기도 했다.
음주로 인해 두통 비슷한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을 끝내고 보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런 일, 저런 일, 소소하게 해결해야 할 일들도 몇 처리했다. 몸도 마음도 제법 가벼워진 채 점심시간을 맞았다. 내가 가장 밝게 상대를 향해 인사를 드리는 시간이 점심시간이다.
"안녕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서너 번의 반복 끝에 급식을 모두 받아 자리에 앉았는데,
'아!'
내 입에서 감히 대뇌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날카로운 신음이 내뱉어졌다.
"아, 이런, 이를 어쩐담? 이를 어찌하나!"
숟가락을 들기 전에 우리 가족 카톡방을 열었다. 떡 하니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었다. 몇 차례의 대화 다음이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혹한기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부대를 이동하면서 훈련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혹한기 군대 훈련. 좋은 경험이다. 군대에서 필수 코스이다. 고맙다."
"이틀만 더 참으면 됩니다. 저니까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생일은 혼자 기념했다."
"미역국! ㅎㅎ. 엄니는요?"
"일찍, 새벽 출근을 하셨다. 바쁘시단다."
오후, 퇴근 후에야 내 방식의 생일 축하 상을 차려 올렸다. 우리 엄마가 평생 가족 생일이면 하셨던 방식 그대로!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늙으니 나는 내 생일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내 생일을 굳이 세고 싶지 않다고 고집한다. 내 생의 수직선에서 'the end'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인식한 후 나는 생일을 기념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렇다 치고 나 아닌 남자는 그렇지를 않을 텐데 미안했다. 그냥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놓지 않았다. 요즘 함께 지내고 있는 손위 처형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는지, 나보다 먼저, 새벽 네 시 회사 식당으로 출근한 언니가 전화를 넣어 왔다.
"니, 왜 그리 사냐?"
"기분이 어떤 것 같아?"
"화난 것 같지는 않더라. 그냥 자기가 미역국 끓여 먹고 나간다더라."
점심상에 미역국을 받고 보니 떠올랐다. 남자의 생일이 오늘(지난주 목요일)이었다. 몇 해 전 보험회사의 메시지로 생일을 알았다던 때, 보험회사에서 보내온 생일 축하 메시지를 내게 보내왔던 때, 다시는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다시 또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런, 이런, 이런. 아, 이를 어쩌나. 밤, 내 뻔뻔한 얼굴을 보고도,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남은 시간을 그림만 그렸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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