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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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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찔했다. 아, 이런!

 

 

이렇게라도 좀 먹었다면 용서가 되리라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조금 남아있는 매생이국을 저녁 식사에서 해치우려고 했다. 저녁 회식이 있다면서 '매생이국, 조금 남았으니 먹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라고 보내온 톡을 읽은 것을 꽉 붙잡은 것이 도가 지나쳤을까. 어서 먹고 치우려는 생각에 정신없이 저녁상을 준비한 것에 집중한 것이 문제였을까. 몸은 피곤하고 '대충'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싶었다. 갑자기 바뀐 생각이었다. 매생이국은 내일 해결하자. 시만 먹기로. 장석주 시인의 시 '매생이국'을 떠올리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가벼운 식사를 하기로 했다. 가볍기는 뭐. 양이 꽤 되었다.

큰 고구마 찐 것 한 개,

아스라파거스 대를 찐 것 서너 도막,

단감 한 개(네 조각),

요플레,

며칠 전부터 먹기 시작한 청국장 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타서 거의 한 컵,

아몬드 열 알,

땅콩 조금.

 

 

이것저것, 양념하고 무치고 조리고 끓이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식사를 혼자서 먹는 밥이면 즐긴다. 이것이 가벼이 느껴져서 의외로 먹는 양이 엄청 많아지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저녁 식사 때면 먹는 것도 일일 때가 많다. 먹고 씻고 어서 자려는 생각에 조리 시간이 불필요한 식사를 취하여도 몸이 피곤하다. 먹다 보면 위아래 입술을 움직여 음식을 취하는 행위도 벅차다. 제발 저녁 식사의 양을 좀 줄이자는 생각을 어제 이 시간에 했던 것처럼 반복하는데, 글쎄 이상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먼저 느꼈을까. 코가 먼저 느꼈을까. 고구마 반 개, 아스파라거스를 거의 다 주워 먹고, 단감 두 조각에 요플레 두세 모금을 섭취하는데 등 뒤로 묘한 기운이 흐른다.

 

 

준비한 양을 반을 먹었을까. 조금 숨이 차다 싶었다. 좀, 천천히 먹지 왜 이러나? 다시 한번 자아 반성을 하는데. 아, 이상했다. 등이 먼저 묘한 기운을 체감했다. 부엌 뒤 다용도실로 나가는 큰 문이 있다. 그 문을 바라보면서 아직 문 밖으로 나가기 전의 실내 왼쪽으로, 즉 큰 문 왼쪽으로 싱크대가 있다. 그 옆 왼쪽으로 싱크대의 개수대와 그릇 받침대(이것을 뭐라고 하더라?)가 세 개의 블록을 형성한다. 그릇 받침대 왼쪽 곁으로 오쿠를 놓는 공간이 코너에 있고 이를 넘어서 니은 자로 꺾으면 조리대가 있다.

 

 

조리대가 있는 쪽, 옆으로 긴 공간은 조리대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넓은 빈 터 공간이 있다. 왜? 조리대이니까. 양옆으로는 비워둬야 한다. 불이 위험하므로. 조리대의 오른쪽 공터가 나 혼자서 식사할 때면 널찍하게 사용하는 곳이다. 즉 부엌 바깥 다용도실과 내가 혼밥을 하는 공간에 서 있을 때는 나의 여성복 상의 호수 85의 등짝이 문을 보고 다용도실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한 다용도실의 기운은 내 비좁은 등이 가장 먼저 확인한 셈이다. 

 

 

자나 깨나 불조심을 나는 잠깐 잊어버린 셈이다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등의 촉감이 나의 뇌세포에 내린 명령이 있어 고개를 돌려보니 다용도실이 부했다. 짙은 안개 가득 모아둔 것처럼 그렇게. 오후에 잠깐 비 몇 방울이 떨어졌다더니, 밤이 되면서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는 것인가. 그렇다고 실내에 저렇게나 안개가 낀다? 무슨 일일까. 다그닥, 쾅, 문을 열었다. 암흑이었다. 온몸이 달달 떨렸다.

 

 

다용도실은 저승에 가까워져 있었다. 매캐한 냄새에 새까만 연기가 다용도실을 집어삼키고 있다. 바깥으로 향한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재빨리 두 곳 문을 확 열었다. 만약 문을 열어뒀다면 연기는 밖으로 빠져나갔을 것이고 실내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내가 느껴야 할 신호를 더 늦게 감지하게 되었으리라. 다용도실 조리대에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양을 담은 냄비의 매생이국은 끓고 또 끓어서 새까맣게  타 없어지고 검은 재로 산화된 후였다. 냄비는 스텐이 내놓는, 반짝거리는 은색이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공포였다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달달 달달, 온몸을 무서움에 떨면서 손위 언니에게 전화를 넣었다. 어느 곳으로든지 지금 내가 견뎌야 할 공포를 나누고 싶었다. 새벽까지 잠 안 자고 있었으니 어디 제정신이냐며 다행이란다. 냄비가 새까맣게 타버렸다. 나와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낸, 구매 당시 최고의 냄비였다. 뚜껑의 손잡이 부분까지 녹아내렸다. 과산화수소와 탄산소다를 합해서 나온 식기 세척제를 물에 희석하여 담가뒀다. 냄비의 뚜껑이며 바닥을 닦아낸다 해도 다시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회식 중일 남자에게도 전화를 넣었다. 차단 기기를 좀 설치하랬는데 왜 하지 않고 있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남자의 소리만큼이나 컸다. 조용히 끊었다. 들어와만 봐라. 벼르고 있다가 오늘은 좀, 일단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에 반신욕으로 향한다.

 

 

아찔했다. 내 삶이 너무 늘어져 있었나 보다. 조물주가 내린 '너 좀 조심해야겠다' 라는 경고성의 뜻이리라. 좀 더 신중하게 살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자. 습관화된 경망스러움이 만든 일이리라.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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