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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여자는 자기 어머니의 삶을 산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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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기 어머니의 삶을 산다는데.

 

 

모전여전으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1

 

 

바로 손위 언니와 나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다. 얼굴 생김새는 물론 분위기까지 제각각이다. 자매인데 어디 닮은 구석이 없겠는가만 유독 사람들은 우리 둘을 놓고 어찌 자매지간인데 그리 닮지 않았느냐고 감탄한다. 감탄이라. 탄식 쪽일 것이다, 아마. 그들이 우리 둘을 비교 평가할 때는 거의 부정적인 평을 내놓은 경우였던 듯싶다. 

 

 

예를 들어볼까. 

"그 사람이 당신 언니야? 세상에나. 하나도 안 닮았네. 어찌 언니하고 동생이 이렇게 달라, 당신 언니 맞아?"

"뭘? 왜 그래? 언니라니까. 그것도 바로 손위 언니야."

"그 사람, 진짜로 사람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데 말이야...., 자기 어머니 닮아 훌륭하다는 말도 꼭 따라붙지."

"엥? 그럼 나는 사람 나쁘기로 소문이 자자함? 어찌 그리 험담을, 진담처럼 하나요? 서운해요. 같은 어머니 딸인데 말이요."

"아,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말이야. 그냥 그렇다고. 당신 언니는 어머니를 그대로 쏙 빼닮아서, 참 좋은 사람이더라고. 마음 씀씀이가 넓고 깊어서 당신 언니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그것을 말하려던 거야."

"알았어요. 친자매라도 닮지 않을 수 있지 뭐. 한데 배다른 자매는 아니라오. 마치 혹 배다른 자매라도 되는 양 눈 희번덕거리면서 말하는데 둘 다 같은 엄마 배 속에서 열 달씩 살다가 나왔다오.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독실한 청교도 수준의, 철저한 유교 지상주의 결혼관을 지닌 사람이거든. 나도 그렇게 살아. 내 남자한테 늘 말하지. 당신, 우리 아버지에게 고마워해. 독실한 유교주의적 결혼관 말이야. 당신하고 지금껏 사는 것은 여자 시집가면 친정 쪽으로는 눈도 주지 말라는 철학을 사시는 우리 아버지 덕분에 지금껏 내가 당신 하고 사는 거야. ㅎㅎ"

 

 

위 대화 내용으로 보면 대화 속 '너'의 위치에 있는 '나'는 분명 된통 화를 내야 맞다. 내가 어찌 나쁜 여자냐고. 내가 누굴 괴롭힌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다만 나의 사는 방법은 '나는 나 알아서 살고 너는 너 알아서 사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면서 산다고. 이게 뭐 잘못되었느냐고. 여기저기 씀뻑 씀뻑 물건도 내주고 마음도 내주면 좋겠지만 우선 나 사느라 바빠서 그저 나 필요한 만큼만 거두면서 사는 것이고, 마음 내주는 것,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인 것을 어찌하냐.'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나쁜 여자'라고 상대가 삿대질해오면 기꺼이 그쪽에 수긍할 것이다. 맞아, 맞아. 맞는 말이다. 네 말이 다 맞고 당신 말이 진리여. 나는 나쁜 여자야, 이기적이고, 독설적이고, 냉차고 지나치게 내 사람 남의 사람으로 단정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나쁜 여자? 인정하는 것인가. 자인하는 것인가. 내 얼굴에 자연스럽게 똥칠하는 것인가. 당연지사이다. 내가 언니와 그렇게 비교되는 것은 마땅하다. 내 평소 언행이나 성격을 돌아보건대 우리 둘을 아는 이들로부터 나의 언행은 틀림없이 들을 만한 언사이다.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드러내 볼까. 기왕 나온 김에 말이다. 익명성이 있지 않은가. 얼마나 허울 좋은 굴레인가. 그 굴레 속에 쏙 내 몸과 영혼을 들이밀어 놓고 그에 기댄 용기를 앞세워 나를 발가벗겨 보자. 물론 전혀 섹시함과는 연결되지 않으니 이 글 재미없다 싶으면 여기서 읽기를 멈추라. 이런, 당당하기도 해라. 이것이 딱 '나'다. 손위 언니와 전혀 유사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다. '도' 아니면 '모'다. 한번 싫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내 사람이다 싶은 간이며 쓸개가 내 몸에 붙어있는 것이 어찌 미안하지 않을 일인가 다 빼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언니와 내가 마음 넓은 여자, 속 비좁은 여자로 비교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름 숨김과 얼굴 숨김을 등에 업고 나를 내가 쳐댈 것이다. 준법정신을 가로지른 일은 또 결코 아니므로 나의 언행을 해부해 보는 것에 걸릴 것이 전혀 없다. 

 

 

나는 전혀 이렇지 못한다. 자매지간으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나는 한 마디로 조곤조곤 내가 사고하는 언어를 내뱉는 여자이다. 이 낱말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내 냉철한 언어놀음이며, 조곤조곤하다. 조용조용하다. 여기, '조'에 붙은 '곤'과 '용'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조용조용'보다는 '조곤조곤'에 가깝다. 이 두 낱말이 다르다지만 유사점이 꽤 있을 듯한데. 더군다나 '조곤조곤'은 '조용조용' 못지않게 지극히 긍정적인 언어생활이지 않을까?

 

 

아니다. '조곤조곤'이 문제다. '조'에 '곤'을 데리고 다니는 이 낱말은 은근한 날카로움을 제 몸에 담고 태어났다. 은근함으로만 멈춘다면 괜찮다. '조곤조곤하다'에는 가닥 지어 틈새를 남기지 않고 한 점 온정을 베풂 없이 까발리려는, 날카로운 침을 지니고 있다. 침은 상대방의 곳곳을 푹푹 찔러대면서 뭔가 찾아내거나 제한하거나 앞서가는 것 혹은 상대의 독창성을 낱낱이 풀어헤치려고 덤빈다. 나는 그쪽이다. 

"그래, 그년 봤어? 뭘 좀 어떻게 하자 했더니 조곤조곤 따져가면서 말하는데 어찌나 날을 세우던지, 아후, 끔찍했어."

사람들은 나와 맞선 후 내 언행을 뒤돌아선 채 이리 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만 내놓는다. 조불조불 인간 대소사를 쓸데없이 나누는 생활에 단연코 확실한 거리를 두고 산다. 내 성격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시간이 아깝다.

"이런. 저만 잘난 줄 알아, 그 인간은. 어찌나 척하는지. 저만 별것이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것들이여."

내 평소 생활을 보고, 어디 함께 가서 수다 류의 말이나 입에서 털어내자는 말을 던졌다가 거침없이 거부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위와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늘 제 잘난 맛으로만 사는 재수 없는 인간이다. 

 

 

막걸리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우리가 마신 막걸리의 형태는 이렇지 않았다. 병 막걸리를 맥주컵에 따라 마셨다.

 

 

한양 땅에서 내려와 있는 손위 언니와 둘이서 막걸리를 찬 삼아 저녁을 먹었다. 오리 훈제에 온갖 야채 볶음의 저녁 식사를 하는데 언니의 행동이며 언어의 율동이 어느 것 하나 내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어 잡소리를 읊어본다. 이곳 저곳, 여기 저기에 사는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얼마나 눈물나게 사는지를 전하느라 바쁜, 그들에게 뭔가 보탬이 되고싶어 환장한, 말하자면 위의 글 속 언니는 곧 내 어머니이다. 나는 돌연변이이다. 여자는 결국 제 어미의 삶을 산다는데 말이다.

 

 

맥주컵 한 잔의 막걸리가 오늘 밤에는 유독 사람 심보를 뒤흔든다. 밤이다. 곧 자정이다. 요즈음 통 아침 일기를 쓸 시간이 없어 슬프다. 바쁘다. 정신없이 바쁘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어 나는 오늘 더더욱 내 자상하신 어머니를 닮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성경 속 마태복음의 이야기처럼, 나는 오늘도 내가 사랑한 사람만 사랑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나의 마음 씀씀이며 마음 나눔이 넉넉하지 못했다. 반성하자. 막걸리 한 잔으로 반성하기도 거침없이 한다. 자, 자자.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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