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봄맞이 준비는 베란다에서 시작된다. 아니, 베란다에서만 봄을 위한 준비가 펼쳐진다.
엊그제 일요일의 낮 대부분을, 베란다에서 보냈다. 녀석들이 나를 불렀다.
“제발, 제발요. 이제는 제발, 당신의 시간 일부를 우리에게 나눠줘요. 때가 되었잖아요. 당신 늘,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때와 장소를 가려서 말하고 행동하라고요. 우리에게 당신의 손길을 주세요. 우리에게 당신의 눈길을 머물러 주세요.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릴케, 당신이 좋아하는 시인의 노래에도 있는 글귀예요. 당신이 읽고 또 읽는 당신의 시인 윤동주의 시에도 그런 비슷한 시 구절이 있어요. 때 맞춰서, 그에 맞는 공간으로 이동하겠다는 간절함을 읊은 글귀들이 있지요. 어서 우리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해 줘요.”
우리 집 베란다에, 그리고 우리 집 거실에 모여 살면서, 아니 모여 살게 되면서, 얼기설기 자연의 무늬를 연출하는 화초들과 나무들이 있다. 녀석들은 모든 것은 자기 자신들이 아닌 타인, 즉 나,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 움직임에 의해 세상을 살게 되었다. 하여 산다. 거의 모두를 내가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 덕분이다. 세상 속 그들의 존재를 내가 형성시켰다.
그렇다면 그들은 내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은가? 아니다. 양심도 없다고 그들은 아우성을 친다. 팻말을 들고 내게 달려들 거다.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생명을 네가 왜 만들어~'
'만들었으면 살려내야지. 죽게 내버려 둘 목숨을 너는 왜 만들어서~'
'이 모양 이 꼴로 곤두박질을 치게 만들어~'
'우리 조상 본래의 모습을 내게 주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목숨을 만들지 말지.'
그래, 나는 눈앞의 것에 치중하였다. 우선 손쉬운 가지치기, 즉 삽목은 열심히 했다. 왜? 그거라도 해야 했다. 일찍이 배운 것이 실내에서, 일조량이며 바람의 양 등이 부족한 공간에서 키우려거든 자꾸 자르고 쳐내야 한다는 말을 신중하게 들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쉬웠다. 그저 손 한번 까닥했다가 모아 버리면 됐다. 한데 이 요사스러운 마음이여, 꼴에, 남의 생명을 귀히 여겨야 제 목숨도 꼿꼿할 수 있다는 세간의 말이 있으니 나는 이를 따랐다. 딱 쉽사리 해낼 수 있는 것은 했다. 생명 존중 사상이 깃든 심오한 정서의 작동이 결코 아니다. 다만 물에 담가 뿌리내리기를 한 것뿐이고 고사 직전의 풀이 뽑힌 영양분 제로의 연식 깊은 화분에 내리꽂아 뿌리내리기를 시도한 것만 해냈다. 시작만 있고 과정이며 끝이 엉성하고 거칠었다. 녀석들의 생 전부를 혀로 핥아가면서까지 보살필 듯 출발했는데 몇 날 채 가지 않아 나는 내가 뿌리내린 한 생명이 된 것들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말았다.
바빴다. 바빴다 치자. 아니 바쁘기를 바랐던 거다. 그럴싸한 변명이 되었으니까.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 신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숙했다. 거칠었다. 만들었으니 그대들 알아서 잘 자라라는 억지로 녀석들에게 자상함을 베풀지 않았다.
녀석들은 충분한 양분을 지니지 못한 채 생을 연명하게 되었다. 열 달 어미 배 속에서의 세속 진출을 위한 몸과 마음 다지기의 단계도 없었다. 야생의 삶을 위한 준비도 없었다. 마구 잘라 뿌리내리기로 키운 후 냅다 화분 흙에 쑥 꽂아놓기가 전부였으니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미 성인이 된 것들의 기류에 적응시켜 고작 물만 겨우 주는 것으로 내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생명이므로 그들은 아프고 스러졌다. 무엇보다 기대 단단히 했던, 소위 주인 나으리라 여겼던 자의 보살핌이 부족하다 보니 아픔에 앞서 분노가 녀석들을 체하게 했다. 분노는 다스려주는 이가 때로 절실하게 필요하다. 체념으로 화하면 지금껏 쌓아 온 힘마저 소실되고 마침내 존재를 놓는다.
지난주 혹 꽃샘추위가 한 번 더 있지 않을까 싶어 세탁소 비닐봉지로 두리둥실 싸 뒀던 아가베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여러 베란다 식물들의 아우성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음이 느껴졌다. 덜 후회하기 위해서는 주말에 꼭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하겠다고 느껴졌다.
식물 키우기 살림살이 속 여럿은 이미 유통 기한을 지난 것이었다. 내가 지닌 것들의 대부분이 그랬다. 새로 구매하지 않았다. 이런 어깃장이라니. 화학 약품인데 유통 기한이 뭐 어떻겠는가 싶었다. 독보적인 솔로에게는 그에 맞게, 블렌딩으로 섞어내기의 조화로움이 필요한 녀석들은 적절한 믹서의 힘을 발휘하여 성장 약효를 제공했다. 내 여윈 몸, 내 혼돈의 영혼으로는 최선을 다한 노력이었다. 마음이라도 충분히 내리부어줘야 함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도 어쨌든 하긴 했다. 화초들의 성장 영양제를 풀어 물을 주고 시든 잎들을 떼어줬다. 말라비틀어진 흙을 몇 뒤집어주고 몇은 복토도 해주었다. 필요한 녀석들에게는 공간 이동도 시켜주고 몇 년을 약속으로 그친 분갈이는 올해도 그다지 해낼 요량이 없을 듯싶어 화분 밑을 꿰뚫고서 쑥쑥 밑으로 자란 뿌리들도 몇 제거했다. 그런데도 하루 낮의 7할은 사용했다. 그 정도도 내가 지닌 힘으로는 대단한 거다.
부디 지금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다 내려놓고 훨훨 날 수 있는 가벼운 몸과 마음이 되어 며칠 마음 편하게 화분 분갈이도 좀 해주고 싶다. 제주 등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조용한 심심산골에 들어가 한달살이라도 좀 하면서 마음의 여유도 좀 누리고 싶다. 가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래도 녀석들이 있어 사는 힘이 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더더욱 미안하다. 나의 식물들이여. 살자.
내일은 꼭 금붕어를 서너 마리 사 와야겠다. 나를 의지할 또 한 생명체를 들이려 한다. 화초들이 웃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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