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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나의 ‘딥 퍼플’, 팬지꽃이 어디로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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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딥 퍼플’, 팬지꽃이 어디로 갔지?

 

 

 

 

 

팬지의 딥 퍼플. 팬지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딥 퍼플. 나의 최애(最愛) 색채이다. 짙은 보라색. 며칠 전부터 나의 딥 퍼플이 나를 부른다. 일터 본 건물로 가는 길에, 거창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면 레드 카펫으로 장식될 것이 틀림없는 공간에, 나의 딥 퍼플이 자리를 잡고 있다.

 

본관 야간 경비 할아버지가 퇴직하셨다. 야간 경비는 그야말로 밤 시간만 경비를 서고 아침이면 퇴근하면 되는 일이었단다. 지난해까지 계시던 할아버지는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고도 한참을 일터 곳곳을 말끔하게 청소하셨다. 철마다 때맞춰 이 꽃 저 꽃들을 가져와 화분에 옮겨 심고 화단에 옮겨 심으셨다. 때가 되어 시들면 다른 화초를 또 가져와 심으시고 분갈이를 하시고 물을 주시고 대단하셨던 분이다. 68세로 정식 퇴직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제법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걱정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만두시면 나의 일터 꽃의 향연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겨울이 점차 물러나고 제법 바람이 부드러워진다 싶을 때쯤 마치 일터 본관 건물 운영자라도 되는 듯이 식물 잔치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깊었다. 점점 일터 곳곳 크고 작은 식물들의 기운이 가라앉아간다 싶어 불안했다. 나의 아침 출근이 가능하게 했던 온갖 식물들. 화초들. 새벽 출근길 나를 위해 양 옆으로 세워져서 나를 감싸주었는데 이를 어찌하나. 

 

 

팬지꽃 색깔들이 참 다양해졌다 - 팬지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다행이었다. 기우였다. 지난해처럼 거창하지는 않지만 올해도 춘삼월이 한가운데에 들어서니 일터 마당 곳곳에 꽃이 보였다. 지난주 금요일 시청 식물 센터에서 묘목을 분양했나 보다. 새로 오신 경비 할아버지는 화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인데 구관이 하셨던 모습 때문에 기대를 했다. 하지만 본래 건물 관리를 맡아하신 분이 계시단다. 낮 동안 여러 곳의 점검 보완에 수리를 담당하신 분이란다. 나는 그분의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3년을 살았던 거다. 그분은 워낙 건물 곳곳 관리에 훌륭하셨다. 야간 경비 할아버지가 워낙 식물 가꾸기를 잘해주셨기에 이분은 그곳까지 손을 대지 않아도 되셨나 보다. 지난 야간 경비 할아버지는 일종의 봉사활동을 하신 셈이었다.

 

시청에서 동사무소로 전달된 봄꽃의 무료 분양을 놓치지 않으셨구나. 가져온 봄꽃들이 심어졌다. 젊은 담당자는 거침없이 일 처리를 하셨다. 순식간에 분갈이를 하셨고 눈 깜짝할 사이 본 건물 화단 앞을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을 곳곳에 장식하셨다. 일터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봄의 기운을 여러 꽃들이 꽃잎 속에 담아 와 전시되었다.

 

팬지가 대표적이다. 흰색, 노란색, 자주색의 본래 색에 여러 형태의 혼합색과 오지색, 붉은색, 푸른색 등의 다양한 색의 조합에 본관 앞과 화단이 분주했다. 그 외 사이사이 여러 종의 봄꽃들이 살짝 제 몸들을 들어앉히느라 바빴다. 파스텔 색조의 데이지들은 부드럽게 자기 자리를 차지하여 고왔고 원색으로 짙은 색조를 담은 꽃들은 너무 환한 것이 지레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기도 했다. 묘목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다 내놓은 채 활짝 피어버린 어떤 꽃은 이미 고개가 너무 무거워 몸을 이기지 못하기도 하였다.

 

나의 일터에 심어진 데이지는 이런 데이지가 아니다. - 데이지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내 성격이라면, 나의 평소 행동을 보면, 내가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연계시킨다면 나는 분명 '순진함'과 '평화'를 이르는 데이지를 챙길 것이라 여겨진다는데(푸아, 내가 순진하다니, 내가 평화스럽다니). 나는 팬지에게 더 많은 눈길과 손길과 마음을 줬다. 그중에서도 딥퍼플의 색을 지닌 것들에게만 눈빛을 줬다. 하여 지난주 내 폰에는 딥 퍼플 팬지들만 새로 담겼다. 진다홍, 연분홍 데이지는 한두 컷에 그쳤다.

 

이런 팬지 비슷했다. 여러 색깔의 데이지가 나의 일터 화단에 와 있었는데 - 데이지로 검색하여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오늘 아침도 나는 딥 퍼플의 신비에 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아파트 둘레길을 한 바퀴 더 걸을까 했다가 어서 팬지에게 가자 했다. 더뎌지는 속도와 좁은 보폭이 느껴지면 재빨리 몸을 가다듬었다. 뒤뚱뒤뚱 힘에 부치더라도 열심히 걸었다. 마침내 도착한 일터. 적어도 3분을 앞당긴 걸음이었다. 

 

밍밍했다. 일터 본관 앞, 나를 에워싸기 위해 나의 길 양쪽에 펼쳐져 있어야 할 봄꽃들이 사라졌다. 마법처럼. 어떤 이가 해리포터의 마법 빗자루를 빼앗아 와서 순식간에 싹 쓸어가 버린 것 같았다. 꽃들이 토요일, 일요일 이틀에 걸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일까. 먹먹해졌다. 무슨 일일까. 내가 서 있어야 할 일터가 아닌 듯싶었다. A라는 건물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만 제정신을 잃은 내가 나의 일터 건물인 A와 엇비슷한 A'의 건물에 들어선 채 나의 잘못된 판단을 인지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 같았다.

 

 

 

팬지로 검색했더니 자꾸 이 녀석과 이 녀석의 가족들이 나왔다. -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아직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본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어리둥절해 있는 나의 모습을 느꼈나 보다. 새로 오신 야간 경비 할아버지셨다. 제대로 모습을 뵌 적이 아직 있지 않아 어설픈 인사를 드리고는 어기적거리면서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내 등 뒤에서 이야기하신다.

"저 놈의 까치가 와서 꽃을 다 따 먹었답니다."

 

 

참, 나는 '딥 퍼플'의 노래를 참 좋아한다. 내일 아침에는 꼭 들어야지. 아, 'Soldier of fortune'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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