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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이렇게나 온전한 연휴를 보낼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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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온전한 연휴를 보낼 수 있다니!

 

그곳 1

 

추석 연휴라면, 명절이 낀 연휴라면 나는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나 뿐인가. 우리, 대부분 모두 그렇다. 꼭 가야만 하는 공간이 있다. 물론 갔다. 당연히 여기고 갔다. 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남자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으레 가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갔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철저한 유교주의자이시다. 아버지는 철저한 남성우월주의를 사셨다. 아마 어머니도 그러셨을 거다. 딸 넷이 안쓰럽기는 했겠지. 자기 같은 생을 살아낼 딸들이 안타깝기는 하셨겠지. 그러나 그녀 또한 사자성어를 중요히 여기시는 친정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셨으니. 철저하게 교육하신 것이 ‘시집가면 그 집 사람이다’라는 것.

 

여느 명절처럼, 여느 추석처럼, 여느 중추 연휴처럼 이번 연휴에도 오늘은 떠나야 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마땅히 떠나야 한다. 모름지기 추석이며 설 명절은 여자는 시집에 있어야 한다.

 

남자의 집은 나의 서식지와 가깝다. 처음 갔던 날에는 한 시간을 넘어 한 시간 삼십 분여 걸렸으나 이제는 삼십여 분에서 사십여 분이면 간다. 아니 삼십여 분 안에도 충분히 갈 수 있다.

 

달린다. 그는 달린다. 그는 사실 어제 떠났어야 했다. 나도 그랬다. 처음부터 아마 십여 년은 그랬던 듯싶다. 남자에게는 이 남자의 대학 1년(?)에 먼저 가신 아버지와 부부지간이었던 한 여인이 존재한다.

 

그곳 2

여인은 오늘 새벽 네 시 경부터 전화를 넣어와야 맞다. 새벽 네 시 되기 전부터 눈을 뜬 채 또 한 여인의 눈 뜸 시각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한 여인의 전화를 재빨리 거실로 나가 받은 후에는 줄곧 곁에 누워 새벽 늦잠을 자는 것의 수면형인 나의 눈 뜸의 동사형을 기다리고 있곤 했다. 2년 전까지는 그랬던 듯싶다.

 

아,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나는 어제 평소 하던 대로 그렇게, 늦은 퇴근을 하면서 오늘내일의 내 일상을 짐작해봤다. 내일, 말하자면 오늘 몇 시쯤 남자의 공간에 가야 할까. 남자는 어떤 일정을 계획하고 있을까. 요즘 그가 그의 한 여인이 있는 공간 운행에 맞추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새벽 출발은 하지 않을 듯한데.

 

그렇담 내일, 말하자면 오늘 떠나 음력 대보름인 내일 오후에야 내가 내 서식지에 돌아올 수 있을 텐데 내일, 말하자면 오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일은 어찌한담? 남자에게 노트북을 가져가자고 해야겠구나. 아니 남자가 가져가지 않아도 그곳에는 고정해 놓은 노트북이 있는 듯싶더라. 밤에 블로그 글은 꼭 올려야지. 그렇다면 내일, 말하자면 오늘 오전에, 즉 남자의 공간으로 떠나기 전에 꼭 블로그 글을 완성하여 임시 저장을 해둬야겠군.

 

손위 언니가 와 있다. 자유인인 그녀는 이제 이곳에 내려오면 새벽 별을 보고 출근하던 옛 직장, 공장의 식당 출입을 멈췄다. 나이 마흔 넘어 결혼한 아들, 그 아내의 임신을 보고 ‘과부’ 짓을 하지 말라는 나의 엄명에 충실하기 위해 한양 땅을 떠나왔단다. 즉, 같은 아파트 단지에 홀로 사는 시어머니 신경을 쓸까 봐 하산했단다.

 

새벽 시장은 아니다. 어제부터 그녀는 제부가 제부 집에 가서 형제들에게 대접할 싱싱한 생선을 사러 수산 시장을 갈 것이라고 퇴근한 내게 말했었다. 아침 여덟 시가 넘어서야 새벽시장으로 둘은 떠났다. 남자는 수산시장을 꽉 쥐고 있는 처형을 모시고 가면 자기 형제들의 입을 행복하게 할 고급 어류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겼나 보다.

 

수산 시장으로 떠난 언니가 가는 도중에 내게 전화를 넣어 왔다. 나는 남자의 집으로 가 있게 될 1박 2일의 여정을 위해 머리 감기를 하려던 중이었다.

“아이, 너, 안 데리고 간단다. 남자들끼리 자기들 어머니 오롯이 모시고 추석 쇨 거란다. 너 뭐 먹고 싶냐? 우리 뭐 해 먹을까?”

펄펄 뛰는 심장을 다독거리면서, 최소한의 태도 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혀 내가 응답했다.

“나, 다 다음 주 해야 할 일터 프로젝트 해결을 위해 이번 연휴는 꼬박 바쳐서 일해야 해. 나 속 좀 편하게 할 요리 좀 해줘. 언니가 해줘야 해, 이번에는.”

언니는 애써 차분하게 응답하는 나의 심장을 이해하고 있다. 이내 언니의 음성도 잦아들었다.

“알았다야. 이번 연휴에는 내가 하마. 참, 며느리 편하게 해주려고 내려왔다가 손아래 동생 모시는 연휴 되겄다야. 알았다, 알았어. 막걸리도 한 병 사갈까?”

“아니야. 어제 마셨잖아. 나 오늘은 좀 쉴 거야.”

“그래, 알았다야. 마님 명령을 따라야지야.”

 

‘행복이다. 온전한 행복이다. 완전한 행복이다. 완벽한 행복이다. 행복하다. 이게 진정 행복이지 않을까. 행복하다.’

라고 마냥 행복해하던 오후, 점심 직후 그가 말했다.

“내일 오전에는 와.”

“엥? 나 운전 싫음.”

“내가 내일 새벽에 데리러 올게.”

‘완벽한 행복’에서 ‘행복’ 두 가지를 꺼내왔다. 추석 연휴의 시작일이다.

 

이곳에 오는 님이여! 보름달 기운 흠뻑 받아 내내 행복하시라.

라고 끝맺으려고 했다.

 

그곳 3

 

한데 오늘밤을 지새려고 했던 피붙이들의 귀향 시간이 끝없이 늘어진다는 전화를 받은 남자. 남은 오후를 집에서 보내던 남자, 어느덧 진짜 오후에 접어들자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남자 왈,

"안 되겠다. 집에 가자. 내가 저녁 무렵 거기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버스 타고 돌아와. 지금 가자."

"그래, 알았어."

"야, 나도 갈게. 심심하다. 나도 따라갈게. 나는 그곳 주변에서 걷기 운동을 좀 하다가 같이 올게."

언니도 따라 나섰다. 

"...... ."

오후 세 시쯤 되어가는 시각이었을까.

 

셋이서 떠났다. 가서 나는 남자의 공간에 내가 다녀감을 그곳에 와 있는 친 그리고 사촌 피붙이들에게 각인시키고 돌아왔다. 남자는 그곳(? 내 서식지로 돌아오는 시내버스가 있는 곳)까지 우리를 바래다줬다. 피붙이들이 싸 온 음식물 중 족발 한 덩이를 내게 안겨줬다.

"가서 이것으로 저녁 때워."

 

이리하여 나는 내 완벽한 연휴에 또 한 가닥의 행복을 발라냈다. 이제 저녁이다. 아홉 시가 다 되어간다. 내사랑에게 한가위 대보름이 내리는 복을 가득 받으라는 메시지를 보낼 참이다. 남은 시간 영화 하나를 더 볼 참이다. 김호중의 콘서트 방송이 있다니 그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내운동도 꼭 할 참이다.

 

결국엔 다녀왔다. 그곳. 남자의 생이 시작된 곳! 나의 생이 시작된 곳은 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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