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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하루 공개

죽음의 시각을 예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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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시각을 예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죽음. 픽사베이에서 가져옴

 

 

장지로 떠나기 전이다. 출발 시각이 지연되었다. 아침 일기 쓰기가 가능해졌다.

 

 

 

집안 어르신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집안에는 두 분이 노구를 이끌고 계셨다. 오랜 세월을 길이길이 엮어오신 서열 위의 한 분은 100세를 눈앞에 두고 계신다. 그 아래, 아마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은 또 한 분이 계셨다. 그 아래에 계시던 분이 가셨다. 지난해에는 시제에도 참석하셨다. 올해 9월 들어서였을까. 위급하여 병원으로 모셨다는 소식이 왔다. 이후 두 달이 채 안 되었는데 돌아가셨다.

 

 

 

비가 예고된 날이었다, 오늘!

 

 

당신에게 가려면 건너뛸 다리가 필요한 나는 그분의 정확한 인생 정보는 알고 있지 못하다. 내가 그렇다. 구구절절 타인의 생을 들춰 알아보는 일 등을 전혀 즐겨하지 않는다. 장지를 가는 정도인데 가신 분에 대한 정확한 삶의 햇수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이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떡하랴, 사람이 그런 것을, 내가 그렇고 그런 생을 사는 것을! 용서하라, 님 들이여. 장지에 가서도 나는 굳이 알려하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도 사실 관심 밖이다. 너무 억지스러운가? 그렇다 해도 사람이 그런 것을 어찌하랴. 어찌 그런 악습을 사느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세 살 적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100세 가까이 되시는 분은 낮 동안 요양원에 다녀오신다. 소위 '어른들의 유치원'이라는 곳이다. 저녁잠은 꼭 집에서 주무시겠다 주장하신다고 했다. 이미 70 줄에 들어선, 혹은 60을 넘긴 아들들이 저녁 수발을 한단다. 여전히 의식은 총총하시단다. 지니고 있는 머리카락 또한 수풀 무성한 산이다.

 

 

 

안부를 물으러 집에 들르는 많은 사람을 틀림없이 알아보신다고 했다. '00 며느리 아니냐?', "00 아들 아니냐?', '00 손주 아니냐?' 물론 가벼운 치매 기운은 있어 진시나 사시, 오시에 집에 들어오셨던 분이 미시쯤에 점심을 함께 먹고, 신시나 유시 정도 되어 당신의 집을 나서면서 인사드리면 아침에 '00 아들'이라던 것을 '^^ 아들 아니냐'라고 하신단다. 

 

 

 

100세 문 앞 노골로 삶을 지탱하고 계시는 분은 코로나19 감염에도 끄떡없으셨단다. 수발하다가 함께 영향을 받아 코로나19에 물든, 70 넘은(?)  아들은 위험 수위에서 죽다 살아났다며 혀를 내두르셨다는데 100세 만세 삼창을 앞둔 분은 거뜬하게 이겨내셨다고 했다. 아무런 증상도 없었단다. 어떠한 고통도 없었단다. 그저 살포시 놀러 와 곁에 앉아있던 이를 떠날 시간이 다 되자 안녕을 고하여 보내주는, 아기자기 소꿉친구 놀이를 즐기신 것일까.

 

 

 

사실 오늘 쓰고 싶은 내용은 이것이 아닌데 서문이 길어졌다. 내 글쓰기의 문제이다. 각설하고!

 

 

 

지난달 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출발일 오전에 관광버스에서 읽었다. 톡에 올라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돌아가신다고 함. 장례식장도 예약해뒀다 함>

 

돌아가신다? 오늘? 장례식장을 예약하다? 그렇담 오늘이 틀림없는 죽음의 날이라는 것인데 어찌 죽음의 순간을 알 수 있담? 당시, 여행이었지만 업무를 어깨에 지고 떠난 것이라서 별 여흥도 없이 떠돌고 있던 참이었다. 산소 호흡기를 떠올리지 못했고 그 황당함에 반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었다. 아무 말이 없이 그냥 넘어갔다. 일상이 늘 바쁜 나는 더 이상 이에 대한 물음도 던지지 않았다. 그래, 산소 호흡기가 죽음의 예약 시각을 정하는 도구였다. 

 

 

 

안장을 위하여!

 

 

 

다시  또 온 알림으로 예약된 죽음은 무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비 갠 다음 날, 별이 총총해지면, 또 그다음 날은 맑고 화창한 날이 펼쳐진다. 호흡 소리에 제법 힘이 돌아왔다고 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이것 역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1차 예약된 죽음의 시각이 지켜지지 않은 셈이다. 하늘 나라와의 예약을 일방적으로 파기된 셈이다. 예약된 장례식장도 물렸겠지. 예약 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므로 이것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몇 다리 건너의 일이었다. 두 번째 죽음 예약 시간은? 그제 목요일 오전 업무 중에 또 톡이 도착했다. '임종! 경찰 지정 종합병원에서 사망진단서 끊음.' 이번에도 예약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죽음에 예약이라는 낱말이 연결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보니 사는 것이 더 허망해졌다. 조물주가 선사한 인간사가 이런 것이구나 싶어 아찔해졌다. 내 생 현 위치가 인생 수직선 상 출발점 '0'에서 상당한 간격으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시각이 예약 가능한 시간을 산다. 제아무리 첨단이며 최첨단을 살아도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데 사실이다. 제법 오래된 것도 사실이다. 현 의학계의 발전 속도를 보면 훨씬 더 많은 '예약된 죽음'을 치르게 되리라. 기계적인 죽음이다. 계획된 삶을 살다가 아니다 싶으면 의도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왜 나의 죽음 예약 시간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느냐는 고소고발사건도 펼쳐지지 않을까. 정도가 지나쳐 놀랄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혹함을 맞볼 수도 있으리라. 진저리 치는 경우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죽음이 문제로다. 산다는 것을 제쳐두고 죽음이 곧 사람살이 중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 있겠다. 사실 언제나,이러나 저러나, 죽음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다. 노령화와 고령화로 치닫을수록 그 경향은 끔찍성을 더하여 나타나리라.

 

 

 

가족 묘지 위로 핀 산국

 

 

산 사람에게는, 장지에서 비석 아래 화장된 육신을 고이 앉힌 후 허전함을 다스리는 것이 사실 가장 힘든 일이 되리라. 오늘 함께 살던 이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드린 고인의 아내는 의외로 의연했다. 마지막 행사로 기도문을 외우셨다. 연보랏빛 산국이 가족묘지 위로 참 곱게 피어 있었다.

 

 

 

꽃 피고 지는 것을 동시에 해내는 계절, 온 세상이 가을 천지이다. 돌아오는 길, 두 눈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오색 단풍의 자연에 앉혀두고 한참 동안 내 죽음을 떠올려봤다.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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