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어느 날의 일기
지난겨울의 어느 날을 돌아본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이곳 블로그에 임시 저장해 둔 글이 백여 편이 넘어설 때마다 다시 임시저장을 하곤 했다. 일기의 내용으로 '겨울날의 일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말이었나 보다. 일요일이었다.
11시 50분이다. 오전까지의 일정이 끝났다. 대부분의 일요일 오전이 이렇다. 눈을 뜬다. 일어난다. 양치질하고 음양수 한 컵을 마신다. 화장실을 다녀온다. 화초에 물을 준다. 어서 이 화초들을 좀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한편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나누면서 식물에게 양분을 공급한다. 단조로운 일요일의 생활 방법이다.
이번 겨울은 일정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한 가지이지만 두 시간여에 진행된다. 아파트 둘레길 걷기를 포함한 아침 운동이다. 며칠 되지 않는다. 한 사흘 열심히 했는데 왼발 발등에 통증이 와서 멈췄다. 이틀을 쉬고 꼭 다시 시작하려니 했는데 비가 내렸다. 겨울치고는 제법 길게 내린다. 오늘 아침도 비가 내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생뚱맞은 나의 아침 활동이 게으른 나에게는 어색하고 힘들다.
새벽녘 물을 마시러 나온 사람은 오늘 아침에는 아무 말을 내놓지 않았다. 어제는 어서 아침 걷기를 하라고 했었다. 미적거리다가 비가 내린다는 이유로 자기가 뱉은 말을 무시하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한번 이야기한 것으로 마감한다. 그것으로 됐다는 방식으로 세상을 산다. 더는 말하지 않는다. 하여 오늘 아침은 내가 벌떡 일어났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나 보란 듯이 일어서서 바깥 옷차림을 챙겼다.
다섯 바퀴를 걷고 걷기의 길을 확장하여 시립도서관 주변 길까지 두 바퀴를 더 걸었다. 사람 간사한지라 일단 밖에 몸을 세우고 움직여보니 또 힘이 솟더라. 자꾸 더 걷고 싶어지고 한 바퀴를 채울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을 걷게 되는 아파트 둘레길의 바퀴 수의 횟수만큼 배가하고 싶더라.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시각을 점검하니 9시가 넘어있었다. 출발 시각을 거슬러 생각해 보니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오늘은 종일 속이 좀 편할 것이며 몸도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에 미리 기뻤다.
오늘이 여느 일요일 오전과 다른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다른 날과 달리 걷기와 화분에 물 주기를 하면서 함께한 일. 이어폰을 통하여 핸드폰의 유튜브로부터 듣기를 한다. 내용을 여러 가지이다. 어떤 날은 경제 뉴스를 듣고 어떤 날은 역사 및 세계사 강의를 듣는다. 가끔 음악을 듣기도 한다. 오늘 아침은 최근 들어 거의 하지 않았던 소설 귀로 듣기를 했다. 낯설었음을 고백한다. 논문을 쓰기 위해 잠 안 자고 듣고 베껴 쓰고 다시 읽었던 소설. 어색해지는 마음을 꼭 누르고 시작했다.
밍기뉴. 자꾸 엄마 앞에서 엉덩이를 까고 체벌을 기다리는 개구쟁이. 제제의 어린 시절을 들었다. 바스콘셀로스, 멕시코 작가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들었다.
윤대녕의 '고모'를 이어서 들었다. 윤대녕은 내게 깊은 관계가 형성된 작가이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 나는 그의 책을 거의 다 사서 읽었다. 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떤 단편 몇은 아마 열심히 베끼면서 읽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한때 그의 소설을 연구했다. 애증이다.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도 들었다. 은희경. 어떤 소설이 있었던가. 그녀도 윤대녕 못지않게 내게 가까이 여겨지는데 생각나는 소설이 없다. 이런, 이런. 이런. 마침내 찾았다. 그녀의 대표작 '새의 선물'이 있지 않은가. 오늘 들은 그녀의 소설은 시대를 초월하는 역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글을 참 맑게 쓰되 맛깔스럽기까지 한다. 그녀를, 그녀의 글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보고픈 생각을 다시, 오랜만에 했던 아침이다.
이곳 블로그의 '임시저장'에 뒀던 지난해 어느 겨울의 일기이다. 오늘내일, 며칠 넘기면 자동으로 버려지겠다 싶어 되살렸다. 상당히 부지런히 움직였던 날이었던 듯싶어서이다. 무엇보다 요즈음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휴일의 아침 걷기가 실려있는 글이어서 반가웠다. 최근 들어 배불뚝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복부의 느낌을 떠올려보니 이 일기를 읽으면서 나를 쇄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위 일기의 그 날 일요일처럼 알뜰하게 살았는가. 요즘 운동을 소홀히 하고 있다. 그림도 너무 긴 시간을 멈춰 있다. 전반적으로 생활 리듬에 게으름이 잔뜩 차지하고 있다. 겨울 되었으니 반신욕도 시작해야 한다. 어쩌자고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일까. 자꾸 일상에서 자포자기 수순으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어서 걱정된다. 나를 부추겨서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힘들다. 일어서자. 일어서야 한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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