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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네 가족, 또, 또, 또, 또, 알을 낳았다. 비둘기네, 또, 또, 또, 또, 알을 낳았다. 올해 들어 두 번째던가 세 번째던가.전체 통틀어 다섯 번째던가, 여섯 번째던가. 아니면 일고여덟 번째?에어컨 실외기 공간에 또 알을 낳았다.이를 어찌해야 하나.새 생명인데,이를 어쩐담. 어떻게 한담?이번 것은 차마 내놓지 못하고 이곳 책상 한쪽에 뒀다.그림으로라도 남겨두는 것이 비둘기 부모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마음이 아프다.  쓰라리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녀석들,이곳, 사람 사는 곳이란, 자기네들에게는 부중지어(釜中之魚)임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한두 번도 아닌데 말이다.(부중지어(釜中之魚)란 ‘솥 안에 있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닌데 왜 못 느겼을까. 비둘기 알. 이번에는 하나만 낳았다... 더보기
디지털과 나의 궁합은 왜 이렇게 안 맞는지 디지털과 나의 궁합은 왜 이렇게 안 맞는 것일까?- 대체 왜 그럴까, 왜, 왜, 왜?    급히 컴퓨터에서 ‘민원24’ 창을 통한 일 처리를 해야 했다. 부지런히, 어서 빨리, 남보다 먼저, 보무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맨 먼저 해결하기로 하고 덤볐다. 아니나 다를까. 창을 열어 아무리 내 정보를 입력해도 마지막에 뜨는 작은 네모 창의 글귀는 다음과 분위기의 글귀였다.‘어쩌고저쩌고 뭔가 오류가 있으니 대기하든지 창을 닫는지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하시오.’“그래, 그러면 그렇지, 이런~”요즈음 하도 분노의 어휘를 욕설로 내놓는 경향이 빈번했다는 자기반성이 일어 ‘이런’에서 속마음을 표하는 것을 끝내고 대체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디지털 창의 일거리들은 왜 이러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 더보기
배지 배지  가끔, 아주 가끔 나와 같이 사는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와우, 배지가 부르네.”‘배지’라! ‘배지’라니, ‘배지’가 뭐지? 남도 삼도의 경계선 지점을 고향으로 둔 남자와의 언어 소통은 연예 기간에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한데, 한 해, 두 해 같이 사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고향’이라면 ‘환장(?)’을 하는 남자의 언어가 낯설고 생소해지기 시작했다. 고향 쪽에서, 고향을 염두에 두고, 고향 사람과 만나는 지점에서 하는 언어 말이다. 그중 한 낱말이 ‘배지’이다. 그는 이 낱말을 꼭 자기 고향에 함께 갈 때면 사용했다. 온 집안의 ‘집사’ 역할이 자기 생의 의무라고 여기고 사는 남자는 고향에서 먹는 자기네 전통 음식을 마음껏 먹고 마신 후 꼭 이 낱말을 사용하여 문장을 만들고 발.. 더보기
그것이 그것인디 그것이 그것인디.   쉬고 있다.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새벽녘 눈이 떠져서 몇 분 인스타그램 여행하기로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잠들었나 보다. 아마 아홉 시 혹은 열 시는 되었으려니 생각했는데 아직 여덟 시대였다. 여덟 시 삼십오 분! 야호? 이런 것을, 빨리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기쁨이 이렇게 큰 것을 어쩌자고 쉬는 날이면 꼼지락대고 있었는지. 그런데도 상체만 이불 속에서 꺼내고서 인스타그램에서 놀기를 삼십여 분 더 했다. 몸 전체를 수직으로 세우지 못한 이유에 합당한 내용을 달기 위해 수첩을 꺼내어 모닝 빵에 어울리는 수프 레시피를 적어뒀다.  그래, 오늘부터는 수첩을 마련하여 음식 레시피라도 적어두자. 겨울, 유튜브를 보고서 몇 음식을 내처 했더니 굳이 복잡하고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더보기
티미하다 티미하다. “공부해라, 공부해. 공부를 해사(해야) 밥 먹고 산다.”일평생 자식 여덟을 교육하고자 사신 나의 부모님. 특히 내 어머니가 사신 생은 자기 생을 단 한 푼도 사시지 않았다. 그녀가 늘 그랬다.“아무리 티미해도 해 싸먼(대면) 못 할 일이 없어야. 안 될 일이 없어. 으짜든지 책을 읽어라. 으짜든지 니(너의) 생각을 쓰고 말하고 살 수 있게 해라.” 눈 떠서 자식을 만나면 하는 말이 이랬다. 그녀는 뒷마을 절의 스님이 동냥을 오시게 하여 두 손 가슴 앞으로 모아 빌고, 빌고 또 빈 내용이 자식들이 공부 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을 거다. 나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늘 이웃집 스님(‘중’이라고도 했다.) ‘동냥’을 오셨다. ‘동냥’은 승려가 시주(施主)를 얻으려고 돌아다니는 일이다. 또는 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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