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하루 공개

고슬고슬하다

반응형

 

 

고슬고슬하다.

 

 

마른 동백잎들 사이로 바라본 하늘도 한껏 고슬고슬했다

 

 

출근길 내내 내 입 안에서 발음되는 낱말이 있다. 나를 사로잡은 낱말이 있다. 두 입술을 부드럽게 움직여 둥글게 모으면서 '고'를 소리 내고 두 입술 끝 감쳐물기 직전 'ㅅ'을 발음하면서 '으'로 곱게 바쳐주면 마침내 소리가 완성되는 낱말이다. 고슬고슬하다. 이처럼 산뜻하고 아름다운 소리의 글자 묶음을 만나려고 그랬나 보다. 좀처럼 하지 않던 내 블로그 댓글 찾아 읽기를 이불속에서 치렀다. 오늘은 꼭 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처럼 말이다.

 

어젯밤 이곳 티스토리 블로그에 올린 내 글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발견한 언어이다. 글을 쓰면서 꽤 긴 시간(오 분여 넘게) 찾던 낱말, 딱 그 낱말이다. '고슬고슬하다.' 나락. 그 동의어인 '벼'가 도정이라는 의식을 거쳐 쌀알이 된다. 쌀알은 몇 도움이 되는 도구들과 어우러져 밥이 된다. 밥으로 변신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물이다. 쌀알에 더해지는 물기의 정도로 우리는 밥의 상태를 점검하며 말한다. 밥도 참 곤혹스러울 것이다. 먹는 이마다 좋아하는 정도가 다르다. 

 

'고슬고슬하다' 는 '되다', '질다', '퍽퍽하다', '꼬들꼬들하다' 등 밥을 먹을 때마다 느끼고 분류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에 꼭 필요한 낱말이다. 어떤 밥을 좋아하느냐를 둘째로 치자. 각 낱말들을 찬찬히 씹으면서 그 분위기에 맞은 얼굴을 만들고 표정을 합하고 운율을 살려 가만가만 소리 내어 보라. 어감상 어느 낱말에 가장 미(美)적 감각이며 미 미(味)적 감각이 담겨 있는지. 나는 이미 골랐다. 내 선택은 이미 밝혀진 셈이다. 선 선택 후 후 물음이라. 젊은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따르자면 말이다. 

 

이 세월을 살도록 나는 늘 고슬고슬한, 즉 된밥에 가까운 밥을 한다. 물기를 쫙 뺀, 밥알이 별 부딪힘 없이 나뒹굴 수 있을 만큼 마른밥을 해서 먹는다. 결코 된밥은 아니다. 꽈상꽈상 물기라고는 전혀 없이 이빨의 노동을 심하게 부리는 정도의 깡마른 밥알은 아니다. '적당한' 밥이다. '알맞은' 밥이다. '최적의' 밥이며 '최상의' 밥이다. 말하자면 지극 정성이 담긴 '중용'의 미학이 담긴 밥이다. 물론 자기 취향이 정답이긴 하다.

 

소국에게도 적당히 고슬고슬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듯

 

 

우리 어머니가 내게 그런 밥을 먹였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왜 된밥을 고집하셨을까. 기억에 내 어머니 쉰 쯤 넘으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었을 것이다. 시골 살림은 백석지기이며 만석지기인들 그저 농사꾼이다. 교육을 위해 도시로 도시로 자식들을 떠나보내면서 생활은 항상 팍팍하였을 것이다. 고 딸, 고 녀석, 저 녀석, 요 딸, 고 아이, 그 딸, 저 끝 딸, 가장 늦은 녀석이 고등학교며 대학교 진학을 하게 되면서이다. 오직 자식 교육 욕심으로 사셨던 내 부모는 그 욕심으로 생긴 그늘이 제아무리 짙어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특히 우리 엄마는 운명인 듯 자기 생은 이미 내던져둔 채 결혼하셨으리라.

 

가슴을 쓸어내리시곤 하셨다. 어떤 날은 나 죽겠다 반복하면서 가슴을 치시기도 하셨다. 소화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목에 위에 그리고 내장에 내려가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 것이 있다 하셨다. 오늘은 밥을 못 먹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데도 왜 된밥 유의 고슬고슬함을 선택하셨을까. 자기 몸은 거의 소화기 장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물기가 거의 없는 적당히 날아다니는 밥알 상태의 밥을 지었던 것일까.

 

'알맞은 상태'라는 것에 대해 한이 맺힌 채 사시지 않았을까. 자식 키우고 사는 데에 지나치게 부족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해야 했던 것이 힘드셨을까. 자식들에게는 적어도 적절한 생활을 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러온 생활 습관이었을까. 삼시 세끼 먹는 밥만은 적어도 '정도에 알맞게' 해서 자식들을 먹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엄마 소화기로는 질디 진밥을 넘어서서 죽처럼 식도에 흘려 넣을 수 있는 밥의 상태가 옳았다. 밥물은 손등 중간쯤에 머물 정도가 아니라 손등을 푹 잠기도록 들이부은 밥을 하는 것이 맞다.

 

'고실고실하다.' 사투리이다. 나는 사실 고실고실하다가 더 친근하다. 나의 어머니는 목화솜 두 뭉치를 나의 결혼 즈음 보내오셨다. 세상에나 이 시대에 무슨 목화솜이냐고 했더니 하셨던 말씀이 있다. '이 솜 타서 이불 만들어 덮으면 고실고실하니 잠이 참 잘 올 것이다.' 고슬고슬하다며 고실고실하다 생각해 보니 건강한 햇빛에 잘 마른 천이 살갗과 랑데부를 할 때도 어울리는 낱말이다. 알맞은 밥의 상태를 드러내는 언어는 수면에 적합한 이불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에도 딱 합이 맞다.

 

개기월식 중 달이 참 곱더라. 소원을 빌었네.

 

'고슬고슬하다.'를 지니고 글을 쓰다 보니 함께 쓰던 비슷한 낱말들이 여럿 떠오른다. 나실나실하다. 이것도 고슬고슬하다의 방언이다. 참 '꼬실꼬실하다'도 있다. '가슬가슬하다'도 있으며 더 나아가 '꼬시다'도 있다. 꼬시다는 너무 나간 낱말인가? 어쨌든 모두 내 어린 시절의 언어이다. 내 고향의 언어이다. 내 추억의 언어이다. 내 어머니의 언어이다. 나를 살게 한 언어이다. 

 

 

반응형